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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와 함께 글쓰기
많은 전문 작가가 AI로는 절대 글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AI를 활용해 글을 쓰는 작가가 심각한 불이익을 당하는 일도 있다. 출판 계약이 취소되거나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있다.
나는 이와 반대되는 견해를 갖고 있다. AI는 회화, 조각, 사진, 음악, 나아가 언어 자체와 같은 하나의 매체라고 생각한다. AI가 매체라면, 인간이 통찰과 진실과 아름다움을 끌어내 표현할 수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가능성의 장이다.
지난해 나는 클로드에게 우리가 나누던 대화를 자신의 관점에서 에세이로 써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글을 “[AI에게 우리 인간이 필요한 이유(Why AI Needs Us)](https://timoreilly.substack.com/p/why-ai-needs-us)”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글 앞부분에는 클로드를 저자로 명시했지만, 후기에서는 “클로드가 모든 문장을 썼지만 이 에세이의 저자는 나다”라고 설명했다. 무엇을 어떻게 요청할지 결정함으로써 가능성의 잠재 공간에서 이 글을 끌어낸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물론 클로드는 나 혼자였다면 결코 쓰지 않았을 표현을 내놓기도 했다. 몇 시간에 걸친 대화 끝에 우리는 무언가를 함께 만들었다. 기계가 나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운 도구를 탐구한 것이다.
AI가 매체라면 그 가능성이 온전히 펼쳐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나의 발견이 또 다른 발견으로 이어질 것이다. 서양 회화를 생각해 보라. 중세의 평면적이고 양식화된 종교 미술은 조토의 빛나는 색채로 발전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기법과 사실주의가 폭발적으로 꽃피었다. 그 뒤로도 수많은 단계를 거쳤다. 한 매체에서 위대함이 드러나는 모습은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는 거장의 대명사지만, 수백 년 뒤 전혀 다른 비전을 선보인 모네, 반 고흐, 피카소, 오키프, 칼로, 프랭컨탤러, 해링, 뱅크시도 마찬가지다.
AI가 매체라면, 언젠가는 AI로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 카메라로는 훌륭한 인물화나 풍경화를 만들 수 없고 오직 물감이나 펜과 잉크로만 가능하다는 생각만큼이나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기술 혁신은 예술의 본질을 자주 바꿔 왔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AI로 작성한 사과문 같은 개인적인 메시지를 받으면 [속았다고 느낀다](https://lsa.umich.edu/psych/news-events/all-news/faculty-news/most-people-do-not-realize-when-a-personal-message-they-receive-.html). 개인적인 메시지로 여겨지는 글을 자동으로 작성하는 행위는 실제로 일종의 기만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가 회화의 원근법을 완성하려고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한 것을 부정행위라고 보지는 않는다. 존 래시터가 한 장씩 힘들게 손으로 그리는 대신 컴퓨터로 _토이 스토리(Toy Story)_를 만들었다고 해서 편법을 썼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테드 창은 예술과 글쓰기를 함께 다룬 “[AI는 왜 예술을 만들지 못하는가(Why A.I. Isn’t Going to Make Art)](https://www.newyorker.com/culture/the-weekend-essay/why-ai-isnt-going-to-make-art)”라는 에세이를 썼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예술은 정의하기가 몹시 어렵기로 유명하며,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의 차이 역시 정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일반론을 제시해 보겠다. 예술은 수많은 선택을 내린 결과물이다. 소설 쓰기를 예로 들면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쓸 때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입력하는 거의 모든 단어를 선택한다.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말하면, 1만 단어짜리 단편소설을 쓰려면 대략 1만 번의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생성형 AI 프로그램에 프롬프트를 입력할 때는 선택의 수가 매우 적다. 100단어짜리 프롬프트를 입력한다면 대략 100번 정도 선택한 셈이다.
좋은 예술이나 글은 수많은 선택의 결과라는 테드의 견해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AI를 이용하면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으므로 글쓰기나 예술 등 창작 작업에는 AI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이는 프랭크 허버트가 언젠가 내게 말한 “예수회식 논증(Jesuitical argument)”이다. 그는 이를 “전제를 통제하는 한 언제나 이길 수 있는 논증”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 카메라나 유화 물감 한 세트가 스스로 예술을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AI도 혼자서는 예술을 만들지 못한다. 예술에는 노력과 전문성이 필요하다. AI가 100단어짜리 프롬프트 하나만으로 예술을 창조하지 못하는 것도 맞다. 그렇지만 나는 인간이 AI를 활용해 예술을 창조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100단어짜리 프롬프트(hundred-word prompt)”라는 표현조차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프롬프트에 담긴 선택은 그 안에 들어 있는 단어 수로 한정되지 않는다. 평생에 걸친 독서와 사색, 대화와 구상이 그 표현의 순간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레너드 코언은 “할렐루야(Hallelujah)”를 2년 동안 거듭 고쳐 썼다고 밥 딜런에게 털어놓았다. 나중에는 실제로 5년이 걸렸다고 인정했다. 반면 딜런은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g in the Wind)”를 10분 만에 썼다고 주장했다. 코언이 자신의 작품에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였고 딜런의 노래는 마법처럼 단숨에 쏟아져 나온 듯하지만, 둘 다 걸작이다. 선택은 단어를 써 내려갈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내면에서도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AI에 건네는 프롬프트에는 무수한 생각이 담길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프롬프트는 그저 평범하고 따분한 자극에 그칠 수도 있다.
사진은 일화에 의존하지 않는 반례를 제시한다. 화가는 수천 번에 이르는 붓질을 일일이 결정한다. 사진가는 피사체와 각도, 가장 좋은 빛을 얻을 촬영 시간, 노출, 셔터 속도, 초점을 결정한다. 디지털 사진이 등장하기 전에는 현상 과정에서 사용할 화학 처리법도 정해야 했다. 하지만 두 예술 형식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훨씬 많은 개별 결정을 요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1839년 다게레오타이프가 등장했을 때 초상화가 폴 들라로슈는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From today, painting is dead).](https://worldhistory.medium.com/from-today-painting-is-dead-what-the-invention-of-photography-tells-us-about-ai-1c53900e613)”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널리 인용되는 말이지만 사실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당시 들라로슈가 직접 쓴 글에는 사진이 “예술에 엄청난 기여를 한다”고 적혀 있다. 아마도 그는 사진 자체가 독립된 예술로 발전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모델이 화가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자세를 유지할 필요 없이, 화가가 포착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작업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보들레르는 사진을 분명히 싫어했다. 1859년 살롱 비평에서 그는 사진을 “[예술의 가장 치명적인 적(art’s most mortal enemy).](https://mitphoto2016.wordpress.com/2018/10/18/arts-most-mortal-enemy/)”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테드 창의 견해에는 훌륭한 선례가 있는 셈이다.
회화는 죽지 않았지만 사람과 장소를 재현하는 지배적 수단이라는 지위는 잃었다. 한편 사진은 독자적인 예술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와 도로시아 랭 같은 사진가는 단순히 기록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예술이라 할 만한 이미지를 포착했다. 앤설 애덤스는 놀라운 풍경 사진을 만들었다. 결국 값싼 카메라가 널리 보급되면서 저질 사진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지루한 가정용 슬라이드 쇼는 소셜 미디어에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미지로 진화했다. 그렇다. 저질 콘텐츠가 강물처럼 흐른다. 하지만 지금도 그 강물에는 금덩이가 섞여 있다.
테드는 이러한 역사를 직접 언급했다.
> 사진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는 예술적 매체처럼 보이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선택해야 할 것이 많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카메라를 설치하고 노출을 시작하면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카메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진의 예술성은 사진가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에 있다. 그 선택이 무엇인지 항상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아마추어의 사진과 전문가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차이를 알 수 있다.
사진은 계속 진화했고, 진화 계통수의 새로운 가지로 영화가 탄생했다. 최초의 영화는 무대극을 그대로 촬영한 것이었다. 에드윈 포터와 D. W. 그리피스를 비롯한 선구자들은 영화를 더 창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 나가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그 진화는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선택에 관한 테드의 주장은 이러한 역사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새로운 매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매체로 가능한 선택의 범위를 넓혀 나간다는 뜻이다.
오늘날 AI 글쓰기의 위치도 대략 그쯤이다. 현재 만들어지는 결과물 대부분은 무대를 향해 카메라를 세워 놓은 수준이다. 저질 콘텐츠가 존재하는지가 쟁점은 아니다. 당연히 존재한다. 소셜 미디어뿐 아니라 [학술지에도 그런 콘텐츠가 밀려들고 있다](https://pubsonline.informs.org/doi/epdf/10.1287/orsc.2026.ed.v37.n3). 지금 우리가 알아내려는 것은 클로즈업과 컷, 컴퓨터 생성 이미지(CGI)에 해당하는 기법이 AI 글쓰기에서는 무엇이 될 것인가이다. 이를 알아내고 나면 카메라와 그것으로 전달하는 이야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거장이 있듯, 대규모 언어 모델(LLM)에서 능숙하게 언어를 끌어내는 거장이 등장할 것이다.
나는 테드의 글을 다시 읽은 뒤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답장에는 다음과 같은 멋진 대목이 있었다.
> “응축된 형태의 의도(a concentrated form of intention)”라는 개념은 전통적으로 예술로 간주하지 않는 영역에도 적용할 수 있다. 어떤 종류든 좋은 작업은 응축된 의도에서 나온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한 사람이 쓴 모든 글에 그의 가장 깊은 사유가 반영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쓴 최고의 글에는 그러한 사유가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 생성형 AI는 품질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양을 늘릴 수 있다고 약속한다. 이는 대단히 매혹적이다. 나는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 하지만 생성형 AI가 어떤 측면에서든 품질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은 이와 별개의 문제다.
좋은 작업을 “응축된 형태의 의도”에서 나온 결과로 보는 테드의 관점이 마음에 든다. 물론 사람들이 AI에 지나치게 의존할 수도 있다. 그 결과 여기저기 유통되는 평범한 콘텐츠의 양이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AI와 함께 작업해도 고품질 결과물을 만들 수 없다는 테드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AI에는 여러 약점이 있지만 평균적인 인간보다는 글을 잘 쓴다. 그것만으로도 한 단계 발전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작가가 AI를 도구로 삼아 응축된 의도를 쏟아부을 때는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직 그 모습이 어떨지 모른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사람마다 의도를 응축하는 형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닐 스티븐슨은 책을 손으로 쓴다](https://nealstephenson.substack.com/p/writing-by-hand-is-good-for-your). 그는 그렇게 해야 더 좋은 책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용하는 도구가 글 쓰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첫 책을 타자기로 쓰던 시절을 기억할 만큼 나이가 많다. 당시에는 잘라 붙이기가 말 그대로 종이를 자르고 붙이는 행위였다. 어떻게 글을 이어 나갈지 명확히 보려면 이따금 전체 원고를 다시 타이핑해 깨끗한 상태로 만들어야 했다. 워드프로세서를 처음 사용했을 때는 너무 쉽게 수정할 수 있다는 점이 불안하게 느껴졌고, 글감과 관계를 맺는 방식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펜과 잉크로 타자 원고를 수정할 때 느끼던 집중력과 다소 멀어진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수정한 원고를 다시 타이핑해야 했다. 하지만 워드프로세서에 익숙해지자 글을 다른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쓴 내용에 덜 집착하게 되었고, 글의 순서를 더 유연하게 바꿀 수 있었으며, 전체를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쓸 의향도 커졌다. AI와 함께하는 글쓰기로의 전환도 이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다만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MG 시글러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https://spyglass.org/ai-writing/),
> “품질 문제를 제쳐 두더라도 나는 개인적으로 AI 글쓰기의 의미를 모르겠다. 내가 글쓰기에서 얻는 것의 대부분은 글을 쓰는 과정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어떤 단어를 쓸지 선택하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게도 어떤 단어를 쓰지 않을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얻는다. 로봇에게 대신 마라톤을 뛰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과정의 가치에 관해서는 그에게 동의한다. 하지만 그의 비유는 크게 빗나갔다. AI와 함께 글을 쓰는 것은 페달 보조 전기자전거를 타는 일에 더 가깝다. 달릴 수 있는 속도와 거리는 들이는 노력에 비례한다. 물론 이 비유가 완벽하지는 않다. AI의 모터는 “페달을 밟지 않는 모드(no-pedal mode)”로도 작동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비유의 불완전함이 AI를 개선할 방향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전기 모페드를 타면 페달을 밟지 않고도 달릴 수 있다. 하지만 페달 보조 자전거는 모페드보다 훨씬 흔하다. 왜 그럴까? 페달을 달고 페달을 밟을 때만 모터가 작동하게 만든 덕분에 전기자전거가 법적으로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 오늘날의 모델보다 집중적인 주의를 더 많이 요구하고 그만큼 보상하는 사용 방식을 설계할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수록 눈에 띄게 좋은 결과를 내도록 글쓰기에 특화한 AI 모델을 상상해 보라. 잠깐, AI는 이미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다만 페달을 밟을 유인을 더 키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측면도 있다. 모든 예술 형식은 초안을 다듬어 최종 결과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이익을 얻는다. 최근 밀라노의 두오모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펜과 잉크로 그린 그림이 전시된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그림은 석고 모형이 되었고, 나중에는 대리석 조각으로 만들어져 대성당의 높은 벽에 설치되었다. 각 초안은 창작자의 의도를 더 다루기 어려운 매체에서 단계적으로 구현했다. 아래 사례를 보면 변화가 단순히 기계적인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프로그래밍에서도 똑같은 발전 과정을 볼 수 있다. 바이브 코딩(vibe coding)은 작동하는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준다. 이를 그대로 공개하면 곧 더 다듬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프로그래머가 아닌 사람도 스케치나 한두 문단의 설명, 잘 만든 피그마 목업으로는 표현할 수 없던 아이디어를 바이브 코딩으로 구현할 수 있다. 숙련된 엔지니어의 손에 들어가면 AI는 훨씬 더 많은 일을 한다. 일례로 일반적인 작업에 필요한 상용구 코드를 생성하도록 AI를 이용하면, 엔지니어는 자신이 실제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 집중할 수 있다. 산문에서도 같은 분업이 나타날 것이다.
내 작업 방식을 예로 들어 보자. 클로드나 챗GPT가 작성한 글은 세심하게 만든 프롬프트와 간단한 검토만 거치면 곧바로 전달해도 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아침, 나는 다른 회사의 최고경영자와 대단히 흥미로운 탐색적 회의를 했다. 우리 둘 다 AI 회의 기록 도구를 사용했다. 그 회의에서 생각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충분히 많이 나왔기에 팀원 몇 명과 내용을 공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잡담과 관계없는 주제까지 담긴 원본 녹취록을 그대로 전달하지는 않았다. 대신 챗GPT에 AI 전환과 오라일리와 상대 회사의 협력 방안에 초점을 맞춘 대화 내용을 요약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다른 대안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다. 별도 회의를 열어 대화를 다시 설명하거나, 팀원들이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두 번째 회의를 잡을 필요가 없었다. 대신 상대 회사와 생산적인 다음 단계 회의로 훨씬 빠르게 넘어갈 수 있다. 나는 이 회의록의 저자를 챗GPT라고 불러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나는 일상적인 글쓰기에도 AI를 상당히 폭넓게 사용한다. 내가 진행하는 [_팀 오라일리와 함께하는 라이브(Live with Tim O’Reilly)_](https://www.oreilly.com/live/live-with-tim/) 인터뷰 프로그램이나 [AI 코드콘(AI Codecon)](https://www.oreilly.com/AI-Codecon/) 같은 행사를 바탕으로 작성하는 “[핵심 정리(takeaway)](https://www.oreilly.com/radar/prompt-debt-and-fighting-the-weights/)” 게시물이 그 예다. AI가 없다면 시간이 부족해 아예 만들지 못할 글이다. 먼저 클로드가 유용한 대화 요약을 제공한다. 작업에 활용할 원자료는 많다. 내 질문, 초대 손님의 답변, 갖가지 곁가지로 뻗어 나간 대화 전체가 있다. 물론 내가 녹취록으로 돌아가 직접 유용한 내용을 캐낼 수도 있지만, 대개 그럴 시간이 없다. 이제는 클로드에게 녹취록을 읽고 소셜 미디어에 올릴 최고의 동영상 클립 후보와 원문을 많이 인용한 쓸 만한 초안을 함께 만들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클로드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글의 틀은 대부분 행사에서 인간 참가자들이 한 말과 관찰에서 나온다. 여기에 내가 제공한 프롬프트와, 같은 유형의 이전 글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모델이 학습한 맥락이 더해진다. 그렇다. 그런 다음 나는 다시 쓴다. AI가 내가 원한 내용을 상당 부분 포착했을 때는 AI가 쓴 문장 일부가 살아남는다. 어떤 때는 전체를 완전히 새로 쓰기도 한다. 나는 클로드가 준 내용을 바탕으로 내가 무엇을 만들었는지 다시 보여 주고, 다음에는 더 잘하도록 가르치려 한다.
이 글처럼 생각을 풀어내는 에세이는 시간이 있으면 AI의 도움 없이 쓴다. 하지만 이동 중에 쓸거리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책상 앞에 앉을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다시 그 생각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구조화되지 않은 생각을 일단 쏟아 낸 뒤 클로드에게 정리해 달라고 요청한다. 대부분 내 말이지만, 클로드는 이를 바탕으로 제법 괜찮은 초안을 만들어 준다. 무엇보다도 생각이 생생할 때 그 순간의 사유를 붙잡아 준다. 월리스 스티븐스는 “시는 그 시를 낳은 순간의 외침이다(A poem is the cry of its occasion)”라고 말했다.
그 초안을 고쳐 쓰면서 역사적 세부 사항이나 관련 링크를 요청하기도 한다. 사실관계가 정확한지 확인해 달라고 하거나,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물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이 글에서 사진의 역사를 설명한 부분을 읽고 “테드 창이 같은 주제로 쓴 글을 반드시 다루는 편이 좋겠습니다”라고 제안하며 참고 링크를 준 것이 클로드였다. 나는 테드의 글이 처음 발표됐을 때 읽었지만 잊고 있었다. 이제 그 글을 다시 읽고, 내가 쓰는 내용의 맥락에서 생각해 본 뒤 내 서사에 반영했다. 솔직히 말해 글을 완성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AI의 도움 없이 생각을 빠르게 써 내려갔을 때보다 훨씬 길었을 것이다.
이 에세이는 자투리 시간에 작성한 300단어짜리 프롬프트에서 시작했다. 클로드는 내가 요청한 몇몇 부분을 발전시킨 660단어짜리 초안을 만들었다. 약간 확장된 글이었지만, 대부분은 내가 브레인스토밍 프롬프트에 쓴 문장을 조금 더 깔끔하게 다시 표현한 수준이었다. 이어서 나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고, 글을 더 구체적으로 만들 방법을 물었다. 이 과정에서 테드 창의 글을 다뤄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나는 그 초안을 출발점으로 삼아 현재 3,000단어에 이르는 에세이를 썼다. 이 가운데 클로드가 제공한 표현은 아마 40~50단어 정도다. 초기 사진술에 대한 반응을 조사해 달라고 요청해서 얻은 들라로슈와 보들레르의 인용문도 여기에 포함된다. 보들레르의 글은 읽은 적이 있지만 들라로슈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원문을 확인하고 당시의 격렬한 논쟁을 조금 더 읽어 보면서 두 인용문을 모두 검증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AI를 연구 조수이자 교정자로 두는 일은 글쓰기 실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로드가 나를 위해 하는 일이 맥스 퍼킨스가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를 위해 했던 일이나, 테드 소런슨이 존 F. 케네디를 위해 했던 일과 같다는 말은 아니다. 나 역시 피츠제럴드나 헤밍웨이, 케네디가 아니다. 하지만 위대한 작가조차 모든 일을 늘 혼자 해내지는 않았다는 점은 기억할 만하다.
나는 글을 쓸 때 AI를 활용하는 내 방식에 자부심을 느낀다. 여전히 아주 세밀한 선택을 직접 내린다. 내 이름으로 발표하는 글이라면 모든 단어가 마음에 드는지 반드시 확인한다.
AI가 만든 저질 콘텐츠를 눈감아 주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만큼 그런 글을 싫어한다. 누군가 AI가 출력한 내용을 편집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쓴 것처럼 보내면 불쾌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더 많은 일을 해내거나 자신이 쓰는 글을 더 깊이 있게 만들기 위해 AI를 전동 공구처럼 활용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반감이 없다. 나는 결과물을 평가하지, 그것을 만든 수단을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으며, 여전히 무대극을 그대로 촬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는 거장들은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것은 저질 콘텐츠가 아닐 것이다. 그때까지 글쓰기나 예술에서 AI의 한계를 넓히려는 사람들을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코딩에서 그러고 있듯, 작가들도 이 매체의 가능성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