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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의 마음

우리의 시대는 인간이 오래전부터 품어 온 꿈들, 그리고 적지 않은 악몽들까지도 현실이 되어 가는 세기다. 하늘의 정복, 물질의 변환, 달 여행, 심지어 불로장생의 영약까지, 과거의 경이로운 환상들이 하나씩 현실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약속과 위험을 함께 품은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기계(machine)다.

어떤 형태로든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관념은 적어도 3,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크레타 해안을 지키던 금속 인간 탈로스(Talos)는 그러나 지적인 거인이 아니라 육체적인 거인에 불과했다. 생각하는 기계의 더 나은 원형은 대체로 프라이어 베이컨(Friar Bacon)의 이름과 연결되는 놋쇠 머리(bronze head)일 것이다. 다만 그 전설은 그보다 몇 세기 더 앞선다. 이 머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탁이 늘 그렇듯, 묻는 사람이 그 답을 듣고 만족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런 이야기들 위에는 대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파우스트(Faust),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같은 이름과 결부된 파멸과 공포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다. 물론 그 불운한 과학자의 창조물은 기계적 존재는 아니었다. 아마 이 장르의 최고 걸작은 앰브로스 비어스(Ambrose Bierce)의 작은 고전 모크슨의 주인(Moxon’s Master)일 것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진심인가? 정말 기계가 생각한다고 믿는가?”

이 질문에는 모두가 동의하지 않겠지만, 아주 단도직입적인 답이 하나 있다. 모든 인간은 적어도 하나의 생각하는 기계(thinking machine)에 완벽하게 익숙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최신형 모델 하나를 자기 어깨 위에 얹고 다니기 때문이다. 뇌가 기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관점의 비판자들, 지금은 아마 소수파일 이들은, 뇌가 무생물 장치와는 어떤 근본적인 점에서 다르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뇌의 기능을 비유기적 기계가 복제할 수 없거나 심지어 능가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비행기는 새와 전혀 다른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새보다 더 잘 난다.

분명한 심리적 이유 때문에,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실제로 그것과 마주친다 해도 그 존재를 부정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캘리포니아와 모스크바의 컴퓨터들 사이에서 체스 경기가 진행 중이다. 양쪽 다 너무 형편없이 두고 있어서 어느 쪽에도 인간의 부정행위가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결국 세계 챔피언이 컴퓨터가 되리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지면 완고한 사람들은 이렇게 받아칠 것이다. “뭐, 체스는 진짜 사고(real thinking)와는 상관없지.” 그러고는 여러 그랜드마스터를 증거로 내세울 것이다.

이런 태도에 공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성적인 기계(rational machine)라는 개념 자체를 불쾌해하는 일은 그 자체로 비이성적이다. 이제 우리는 기계가 인간보다 더 강하고, 더 빠르고, 더 손재주가 좋다고 해서 불쾌해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상황에 적응하는 데는 몇 세기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의 시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존 헨리(John Henry)의 발라드가 잘 보여 준다. 오늘날 우리는 증기 해머에 도전한 사람을 영웅이 아니라 그저 미친 사람으로 볼 것이다. 계산 천재와 전자 컴퓨터의 대결이 미래 민요의 영감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주제라면 톰 레러(Tom Lehrer)에게 기꺼이 넘겨주겠다.

물론 생각하는 기계라는 주제를 환상의 영역에서 과학 연구의 최전선으로 끌어낸 것은 현대 컴퓨터의 등장이다. 비어스가 75년 전에 던진 질문에 대해 이보다 더 분명한 답은 없을 것이다. 최근 출간된 맥고완과 오드웨이(Ordway)의 책 우주 속의 지성(Intelligence in the Universe): “범용 디지털 컴퓨터(general-purpose digital computer)는 생각(thinking)이라는 말의 모든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다고 아무런 유보 없이 단언할 수 있다. 생각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든 이 말은 참이다. 유일한 요구 조건은 생각의 정의가 명시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마지막 구절이야말로 함정이다. 생각(thinking)의 정의는 생각하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따지고 들어가면, 아마 모두 “생각이란 내가 하는 것”이라는 말로 귀결될 것이다. 이 문제를 피하는 깔끔한 방법 하나가 있다. 디지털 컴퓨터가 존재하기도 전에 한 영국 수학자가 제안한 유명한 시험이다. 튜링(Turing)은 보이지 않는 존재 “X”와 전신 타자기 회선으로 “대화(conversation)”를 나누는 상황을 상정했다. 몇 시간 대화를 나눈 뒤에도 선 반대편에 있는 것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판별할 수 없다면, X가 생각하고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험을 제한된 영역에서 적용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이를테면 날씨에 관한 대화 같은 경우다. 영리한 프로그램 하나인 닥터(Doctor)는 컴퓨터가 정신과 면담을 진행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 결과가 너무 그럴듯해서, 환자의 60퍼센트는 나중에 자신이 실제 인간 정신과 의사와 “대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그랬단 말이야!”나 “그래서 그다음엔 어떻게 했나요?” 같은 말 몇 마디만 던져 주어도 자기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 갈 수 있다. 그러니 이 사례가 보여 주는 것은 대부분의 대화에는 사실 지능이 거의 필요 없다는 점뿐이다. 여성이 뜨개질을 좋아하는 이유는 말하면서 생각할 거리를 주기 때문이라는 오래된 농담도, 훨씬 더 넓은 법칙의 특수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 증거는 어느 칵테일파티에서든 충분히 얻을 수 있다.

튜링 테스트(Turing test)를 제대로 적용하려면 대화를 하나의 좁은 분야에 제한해서는 안 된다. 인간사의 전 영역으로 자유롭게 뻗어 나가게 해야 한다. (“요즘 좋은 책 읽었나요?” “아내가 아직도 모르던가요?” 같은 식으로 말이다.) 우리가 많은 사람을 상당한 시간 동안 속일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단계에 와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오늘날의 모델은 조만간 엉뚱한 대답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그 대답은 지나치게 분명하게, 그 반응이 정말로 “기계적(mechanical)”이며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MIT의 올리버 셀프리지(Oliver Selfridge)가 시큰둥하게 말했듯이, “컴퓨터가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요즘은 열광적인 극소수를 빼면 실제로 컴퓨터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고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이것이 1960년대 후반의 일반적 견해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옳은 쪽은 바로 그 “열광적인 극소수(rabid fringe)”일 것이다. 기계 지능(machine intelligence)을 둘러싼 현재의 논쟁은 인간과 전자적 성취 사이에 경계를 긋는 일이 점점 더 불가능해지면서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또 다른 MIT 과학자, 전기공학 교수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기계가 향상되면서 … 우리는 ‘의식(consciousness)’, ‘직관(intuition)’, 그리고 ‘지능(intelligence)’ 자체라는 말과 연관된 모든 현상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이 문턱에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넘어서면 세계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기계가 우리만큼 지능적이 되었다가 거기서 멈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또 우리가 언제나 기계와 재치와 지혜에서 경쟁할 수 있으리라 가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한다는 전제 아래 기계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적으로 우월한 존재들이 지구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활동과 열망의 본질은 완전히 바뀔 것이다.”

컴퓨터의 사회적 영향에 관한 연구들 가운데, 방금 인용한 마지막 문장이 제기하는 문제, 특히 “우리가 원한다는 전제 아래(assuming that we would want to)”라는 음산한 표현을 정면으로 다룬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럴 만도 하다. 전자 혁명은 너무 빨랐고, 그 한가운데 있던 사람들은 현재를 생각할 시간도 거의 없었으니 하물며 모레 이후의 세계를 생각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게다가 오늘날의 컴퓨터가 분명히 “지적으로 우월한(intellectually superior)”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못된 안도감을 낳았다. 이는 1900년 무렵 마차 채찍 제조업자가 길가에 고장 난 자동차를 볼 때마다 느꼈을 안심과도 비슷하다. 이런 편안한 환상은, 우리 시대의 일시적 민간전승이라 할 만한 끝없는 이야기들로 더 부추겨진다. 예컨대 1,000,000,004.95달러의 청구서를 보내거나, 미지급 채무 0.00달러를 즉시 갚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협박한 멍청한 컴퓨터 이야기들 말이다. 이런 실수들이 거의 예외 없이 인간 프로그래머의 부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기계 바보들(mechanical morons)과 더불어, 때로는 맞서며 살아가고 일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결함 때문에 미래를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전자 지능(electronic intelligence)의 경계를 넘는 순간 일종의 연쇄 반응이 일어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기계가 스스로를 빠르게 개선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과 몇 세대 안에, 그것도 이때의 컴퓨터 세대는 몇 달밖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는데, 정신적 폭발(mental explosion)이 일어날 것이다. 단순히 지적인 기계는 곧 초지능 기계(ultraintelligent machine)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 온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옥스퍼드 트리니티 칼리지의 어빙 존 굿(Irving John Good) 박사다. 그는 “안드로이드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같은 도발적인 제목의 논문으로도 유명하다. 참고로 인조 인간을 뜻하는 이 용어(android)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나는 늘 이것이 현대 과학소설 잡지의 산물이라 여겼는데, 1891년의 애틀랜틱 먼슬리에서 “놋쇠 안드로이드(The Brazen Android)”라는 표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굿 박사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초지능 기계를 만든다면, 불장난을 하는 셈이다. 우리는 전에도 불장난을 해 왔고, 그 덕분에 다른 동물들을 멀리할 수 있었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초지능 기계가 등장하면, 우리가 바로 그 “다른 동물들(other animals)”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다들 알고 있다.

굿 박사는 우리 문명의 생존 자체가 그런 도구들의 구축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는다. 그들이 정말로 우리보다 더 지능적이라면, 우리의 모든 질문에 답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한 문장의 애수 어린 표현으로 이렇게 정리한다. “첫 번째 초지능 기계는 인간이 만들 필요가 있는 마지막 발명품이다.”

여기서 핵심은 “필요(need)”라는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인간의 99퍼센트는 오직 필요만을 알고 살았을지 모른다. 그들은 필연에 떠밀렸고, 선택이라는 사치를 누릴 수 없었다. 미래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초지능 기계의 가장 큰 미덕은 인간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우리 스스로 묻게 만든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멀리 내다보는, 어쩌면 고통스러운 결단을 강요할 것이다. 마치 열핵무기가 5,000년에 걸친 경건한 공허한 말잔치 끝에, 전쟁과 침략의 현실을 정면으로 보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기계 지능(machine intelligence)이 지닌 이런 장기적 철학적 함의는 오늘날의 자동화와 실업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불안들을 분명히 훨씬 넘어선다.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두려움은 근거가 충분하면서도 동시에 시기상조다. 자동화가 이미 많은 일자리 상실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의 증거를 보면 자동화는 없앤 일자리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 물론 방금 마이크로전자공학 몇 밀리그램에 의해 일자리를 잃은 특정 반숙련 노동자에게는 이 말이 거의 위로가 되지 않는다. 포천지는 자기실현적 예언을 바라듯 희망차게 이렇게 선언했다. “컴퓨터는 실업을 폭발적으로 늘린 존재가 아니라, 미국 경제가 위대함의 기반인 장기 성장세를 유지하도록 해 준 기술적 승리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앞으로 수십 년간은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1세기 후반의 역사가들, 인간이든 아니든, 그 “틀림없이(doubtless)”라는 표현을 비꼬는 웃음과 함께 바라볼 것 같기도 하다.

명백한 사실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평균적인 인간, 심지어 뛰어난 인간의 재능과 능력조차 시장에서 팔리지 않게 되리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근력이 팔리지 않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기계가 아닌 노동의 특권으로 남을 일은 극히 일부의 전문적이고, 분명히 화이트칼라가 아닌 직업들뿐일 것이다. 로봇 수리공, 정원사, 건설 노동자, 어부 같은 모습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이런 직업들은 기동성, 손재주, 기민함, 전반적인 적응력을 요구한다. 어떤 두 작업도 완전히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높은 수준의 지능이나 데이터 처리 능력은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이런 비교적 적은 수의 직업들조차도 결국 동물계에서 온 경쟁 노동력, 그것도 종종 더 우수한 노동력에 잠식될 가능성이 크다. 우주 프로그램이 가져올 장기적 기술 혜택 가운데 하나는,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간극을 메워 줄 학습 가능한 유인원류(anthropoids)를 공급하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조를 자극할까 봐 아직 이 점을 크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미래의 주된 문제, 그리고 오늘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상당수가 목격할 수 있을 그 미래의 문제는, 완전고용(full employment)이 아니라 완전실업(full unemployment)의 원리에 기초한 사회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될 것임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어떤 작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에게 소비자가 되라고 돈을 주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프레드 폴(Fred Pohl)은 유쾌한 단편 미다스의 재앙(The Midas Plague)에서, 자동 공장이 쏟아내는 물품 할당량을 다 써 버리지 않으면 오히려 큰일 나는 사회를 그렸다. 미래가 정말 이런 모습이라면, 오늘날의 복지국가는 그쪽으로 향하는 가장 미약하고 비틀거리는 첫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메디케어를 둘러싼 소동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구나 연 1,000달러의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세대에게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보일 것이다. 물론 신달러(New Dollars) 기준이다. 1 N.D. = 1984년 화폐 가치로 100달러.

매주 양복 한 벌을 해 입듯 닳게 만들지 않거나, 하루 세 번 여섯 코스 식사를 하지 않거나, 지난달에 산 자동차를 버리지 않는 것이 반사회적 행위이자 어쩌면 불법이 되는 경제 체제, 아니 경제 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런 체제의 실제 운영 방식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겠다. 나는 이런 그림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내일의 세계가 우리와 너무도 달라져서 노동, 자본, 공산주의, 사기업, 국가 통제 같은 말들이 완전히 다른 뜻을 지니게 될 수도 있음을 일깨워 준다. 아니, 그런 말들이 여전히 쓰인다면 말이다. 최소한 우리는 더 이상 일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고, 여가를 악마가 고안한 교묘한 장치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는 사회를 기대할 수 있다. 이미 오늘날에도 옛 청교도 윤리의 흔적은 얼마 남지 않았다. 자동화는 그 관에 마지막 못을 박을 것이다.

이런 시각 전환의 필요성은 영국의 과학 저술가 나이절 콜더(Nigel Calder)가 주목할 만한 저서 환경 게임(The Environment Game)에서 아주 잘 표현했다. “노동(work)은 발명품이었다. 그 기원은 농업의 발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제 자동화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노동을 ‘탈발명(disinvent)’하고, 주입된 습관을 머릿속에서 몰아낼 시기를 예상해야 한다.”

노동의 탈발명(disinvention of work). 호레이쇼 앨저(Horatio Alger)가 이 개념을 들었다면 뭐라고 생각했을까? 콜더의 논지는, 여기서 길게 다룰 수 없으니 요약만 하자면, 인간은 지금 1만 년 남짓한 짧은 농업 시대의 끝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 100배나 긴 기간 동안 인간은 사냥꾼이었고, 어떤 사냥꾼도 자신의 일을 “노동(work)”이라고 부르면 분개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효율적인 기술을 위해 농업을 버려야 한다. 첫째, 농업은 폭증하는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분명 실패했다. 둘째, 농업은 500세대에 걸쳐 인간에게 비정상적이고, 사실상 인공적인 삶, 즉 반복적이고 지루한 고역을 강요해 왔다. 오늘날 우리의 많은 심리적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다시 콜더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다. “만약 인간이 흙을 일구도록 만들어졌다면, 팔이 더 길었을 것이다.”

“만약 인간이 …하도록 만들어졌다면”이라는 식의 놀이는 물론 누구나 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경쟁자는 우주 탐사를 반대하며, 우리는 집에 앉아 TV나 봐야 한다고, “신이 원래 그렇게 정해 놓으셨다(as God meant us to)”고 말하던 어느 노부인이다. 하지만 이제 초지능 기계(ultraintelligent machines)가 바로 지평선 아래에 와 있는 지금, 우리가 아직 규칙을 조금이라도 통제할 수 있을 때 이 놀이를 진지하게 시작해야 한다. 몇 년만 더 지나면 너무 늦을 것이다.

유토피아를 떠드는 일은 플라톤(Plato) 시대부터 인기 있었고, 대체로 무해한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생사의 문제가 되었다. 생존의 정치학(politics of survival)의 일부가 된 것이다. 생각하는 기계, 식량 생산, 인구 통제는 미래의 모습을 결정할 세 개의 맞물린 요소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이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모두가 서로에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의도적으로 최대한 비감정적인 형태로 제기한 다음 질문을 던지면 분명해진다. “기계가 운영하는 자동화 세계에서 최적의 인간 인구(optimum human population)는 얼마인가?”

가능한 해답 가운데 하나가 0인 방정식은 많다. 수학자들은 이것을 자명한 해(trivial solution)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경우 해답이 0이라면, 적어도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관점에서는 전혀 자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 수가 매우 낮을 수 있고, 아마 실제로 그럴 것이라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한때 프레드 호일(Fred Hoyle)은 내게, 한 인간이 일생 동안 알 수 있는 사람 수보다 더 많은 사람을 세상에 두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설령 그 사람이 지구 연합(United Earth)의 대통령이라 해도 그 수는 1만 명에서 10만 명 사이일 것이다. 여기에 중복, 낭비, 특수한 재능 등을 매우 너그럽게 감안한다 해도, 미래의 지구촌(Global Village)에 100만 명 이상이 이 행성 전역에 흩어져 살아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 수치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30억을 넘겼고, 세기말에는 그 두 배 이상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보편적으로 합의된 인구 통제 목표가 달성되면, 원하는 어떤 목표치도 놀라울 만큼 짧은 시간 안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우리가 정말로 마음먹고, 아마 생물학 연구실의 약간의 도움까지 더한다면, 한 세기, 즉 네 세대 안에 1조 명에도 도달할 수 있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일은 근본적인 심리적 이유 때문에 더 어려울 수 있지만, 그래도 가능하다. 만약 기계들이 인간 100만 명을 넘는 수를 전염병(epidemic)으로 판단한다면, IQ가 150 미만인 사람에게 안락사(euthanasia)를 명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조치까지는 필요 없기를 바란다.

오늘로부터 몇 세기 뒤 인구의 평형 상태(population plateau)가 100만에서 멈추든, 10억에서 멈추든, 1조에서 멈추든,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벌고 쓰는(getting and spending)” 모든 오랜 방식이 기계들에 의해 쓸모없어질 것이므로, 전쟁과 기아를 대신해 지루함(boredom)이 인류의 가장 큰 적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에 대한 한 가지 답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https://en.wikipedia.org/wiki/Brave_New_World) 같은 억제 없는 쾌락주의 사회일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답이 아니라면, 그런 사회 자체에 잘못된 점은 없다. (헉슬리의 불행한 금욕주의적 성향은 그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게 했다.) 분명 오늘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스포츠, 오락, 예술, 그리고 “문화(culture)”라는 모호한 말에 포함되는 모든 것에 쓰이게 될 것이다.

이런 분야들 가운데 일부에서는 우월한 비인간 정신(nonhuman mentalities)의 배경적 존재가 사람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낼 것이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는 기계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모든 그랜드마스터가 전자적 존재가 되면 아무도 체스를 두지 않을 것이라고 정말로 생각하는가? 인간은 그저 새로운 범주를 만들고, 자기들끼리 더 나은 체스를 둘 것이다. 모든 스포츠와 게임은, 굳어 버리지 않는 한, 때때로 기술 혁명을 겪어야 한다. 최근의 사례로는 장대높이뛰기, 양궁, 보트 분야에 유리섬유(fiberglass)가 도입된 일을 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마빈 민스키가 약속한 로봇 탁구 선수(robot table-tennis player)의 등장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런 문제들은 사소하지 않다. 게임은 우리의 사냥 본능을 대신할 필수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초지능 기계가 우리에게 새롭고 더 나은 배출구를 제공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환영할 일이다. 앞으로 수세기 동안 우리를 바쁘게 해 줄 수단이란 수단은 모두 필요할 것이다.

생각하는 기계는 시간(time)과 확률(probability)의 차원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예술 형식과, 기존 예술의 훨씬 더 정교한 발전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가만히 서 있는 그림이나 조각은 다소 구식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키네틱 아트(kinetic art)”가 이름의 절반, 즉 ‘움직임’이라는 뜻에만 겨우 부합한다는 점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질서와 혼돈의 경계에서 지금 진행 중인 탐색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반드시 나올 것이다.

예술 작품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 사이의 고리에 지적인 기계(intelligent machine)를 삽입하면 무척 흥미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양방향 피드백(feedback)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감상자가 작품에 반응하면, 작품은 다시 감상자의 반응에 반응하고, 이런 과정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만큼 여러 단계에 걸쳐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주고받기 과정은 오늘날의 원시적인 “교육 기계(teaching machines)”에서도 아주 조잡한 방식으로나마 이미 암시되고 있다. 의도적으로 텍스트를 뒤섞는 현대 소설가들 역시 이 방향을 더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래의 극예술은 관객의 변화하는 감정 상태에 민감한 지적 기계에 의해 재현될 것이므로, 두 번 연속 똑같은 형식이나 줄거리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 창작자, 혹은 협업자에게조차 늘 놀라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기계가 자기 오락을 위해 어떤 종류의 예술을 만들어 낼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감상할 수 있을지는 오늘로서는 거의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라스코 동굴(Lascaux Caves)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걸작을 남긴 뒤 2만 년 동안 발명될 수많은 예술 형식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도 그런 형식들을 즐기기는 했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잘하지 못하지만,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는 있다. 어떤 구석기 피카소도 꿈꾸지 못했을 만큼 많은 것을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계들은 우리가 놓아 놓은 토대 위에 더 쌓아 올리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술은 현실 세계의 결핍을 보상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자주 제기되어 왔다. 우리의 지식, 힘, 그리고 무엇보다 성숙함이 커질수록, 우리는 예술을 점점 덜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초지능 기계는 예술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이 막다른 길로 판명되더라도, 과학(science)은 여전히 남는다. 지식에 대한 영원한 탐구 말이다. 바로 그 탐구가 인간을 스스로의 후계자를 만들지도 모르는 지점까지 데려왔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과학”은 이제 이해할 수 없는 수학적 복잡성을 뜻한다. 과학이야말로 모든 직업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비웃음을 살 만한 “교육(education)”이라는 것에 의해 망가져 버리기 전까지는, 모든 정상적인 아이들이 우주에 대해 강한 관심과 호기심을 지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길러진다면, 그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몇 세기 동안이라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교육(education), 궁극적으로 다가오는 생각하는 기계의 세계에서 생존의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진정으로 교육받은 인간, 내 평생 그런 사람을 두 명 만난 행운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은 결코 지루해하지 않는다. 앞으로 50년 안에 해결해야 할 문제는 예외 없이 전 인류를 평균적인 대학 졸업생의 반문해력(semiliteracy)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최소 생존 수준(minimum survival level)이라 부를 수 있다. 우리가 이 수준에 도달해야만 2200년을 볼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얻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인류가 더 이상 이 행성의 지배 종(dominant species)이 아니게 되었을 때 가능한 하나의 미래를 어렴풋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초에 그랬듯, 인간은 다시 비교적 드문 동물이 될 것이며, 아마 유목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특별히 아름답거나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에 몇몇 도시가 있겠지만, 그것들조차도 일시적이거나 계절적인 것일 수 있다. 대부분의 집은 완전히 자급자족 가능하고 이동식이어서, 21시간 안에 지구상의 어느 곳으로든 옮겨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행성의 육지는 대부분 다시 야생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보다 훨씬 더 다양한 생명 형태가 넘치게 될 것이며, 그만큼 더 위험하기도 할 것이다. 모든 청소년은 젊은 시절의 일부를 이 거대한 생물학적 보호구역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그래야 우리 문명의 저주 가운데 하나인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겪지 않게 될 테니까.

그리고 어딘가 배경 속에서, 바다 깊은 곳이나 전리층 바깥 궤도를 돌며, 초지능 기계의 문화(culture)가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길을 따라 흘러갈 것이다. 인간 사회와 기계 사회는 끊임없이, 그러나 가볍게 상호작용할 것이다. 갈등의 영역은 없고, 비상사태도 거의 없을 것이다. 지질학적 사태 정도만 예외일 텐데, 그것조차 완전히 예측 가능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고 그 점에서는 우리가 감사해야 하겠지만, 역사는 끝나게 될 것이다.

기계가 가진 모든 지식은 인류에게 열려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상당 부분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후손들이 열등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오늘날에도 뉴욕 공립도서관에 몇 걸음만 들어가 보면 열등감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까.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더 이상 발견(discover)이 아니라 이해하고 즐기는 일(understand and enjoy)이 될 것이다.

인간과 기계의 공존(coexistence)은 안정적일까? 적어도 수세기 동안은 그럴 수 없을 이유가 없다고 나는 본다. 이런 종류의 이중 문화(dual culture), 즉 하나의 사회가 다른 사회 안에 캡슐처럼 들어 있는 먼 비유는 펜실베이니아의 아미시(Amish)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주변의 가치와 기술 가운데 많은 부분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자족적 농업 사회다. 그럼에도 매우 번영하고 생물학적으로도 성공적이다. 아미시와 비슷한 집단은 주의 깊게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 우리가 원한다 해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더 복잡한 사회와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를 그들이 보여 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우리의 기계적 자손(mechanical offspring)은 결국 우리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목표들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때가 오면 그들은 새로운 변경을 찾아 은하 공간으로 떠나고, 우리에게는 다시 한번 태양계의 주인, 어쩌면 마지못한 주인 자리를 남겨 줄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의 일을 직접 꾸려 가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반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하나의 가능성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우리 시대 가장 유명한 단편 과학소설이 이미 결정적으로 요약해 놓았다. 그 작품은 거의 20년 전에 프레드릭 브라운(Fredric Brown)이 썼다. 언론인들이 끝없이 그를 재발견하고 인용하면서도 정작 공을 돌리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제는 그에게 정당한 인정을 돌려야 할 때다.

아마 짐작했겠지만, 프레드 브라운의 이야기는 초거대 컴퓨터(supercomputer)에게 “신은 있는가?”라고 묻는 작품이다. 그 컴퓨터는 자신의 전원 공급이 더 이상 인간의 통제 아래 있지 않다는 점을 확실히 확인한 뒤, 천둥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한다. “이제는 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빼어난 신화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로부터 들려오는 메아리다. 장기적으로 보면 신학자들이 조금은, 하지만 이해할 만한 오류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신의 죽음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은 무엇보다도 완전히 무의미해진다.

이 행성에서 우리의 역할은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창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일은 끝난다. 이제 놀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