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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의 종말이 왔다
2,300년 전 전설에 따르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궁정 고문에게 세상의 모든 저작을 망라한 장서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에서 복무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인류 지식의 총합을 보존할 도서관을 구상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이 임무를 물려받았다. 왕실 병력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는 모든 배를 샅샅이 뒤져 두루마리를 찾아냈다. 그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을 본뜬, 뮤즈에게 바치는 성소인 무세이온에 보관됐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장서도 그 소장품 가운데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역사는 상당 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이 전근대 세계의 위대한 지적 성취가 다수 이루어진 장소였다는 사실을 안다. 왕은 학자들에게 도서관에서 살며 연구하도록 보수를 지급했다. 한 방문한 그리스 수사학자는 이 장서가 “연구에 열성적인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도시 전체가 지혜를 얻도록 북돋웠다”고 썼다.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곳도, 제노도토스가 호메로스 서사시의 가장 오래된 필사본을 편집한 곳도 이 도서관이었다. 기하학의 *원론(Elements)*을 쓴 유클리드 역시 그곳에서 공부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학문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서기 400년 무렵 도서관은 사라졌다. 많은 학자는 그 파괴를 역사상 가장 큰 지식의 상실이자 암흑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역사가들은 무엇이 잘못됐는지 이해하려고 수 세기 동안 파피루스 조각들을 분석해 왔다.
전통적으로 그 답은 전쟁이라고 여겨졌다. 기원전 48년 알렉산드리아 포위전 중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불을 질러 적어도 4만 개의 두루마리가 불탔다. 도서관은 축소된 형태로나마 서기 4세기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다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의 추종자들이 남은 필사본을 보관하던 이교도 신전을 약탈했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런 극적인 사건의 중요성을 낮게 본다. 대신 훨씬 평범한 사인, 곧 방치에 주목한다.
장서를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습기, 쥐, 곤충이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서서히 갉아먹었다. 필경사들은 오래된 문서가 손상돼 읽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끊임없이 베껴야 했다. 결국 도서관을 유지하는 어려움이 그것을 보존하려는 의지보다 커졌다. 고전학자 로저 배그널은 이렇게 썼다. “도서관의 소멸이 암흑시대를 불러온 것도 아니고, 도서관이 살아남았다 해서 그 시대가 더 나아졌을 것도 아니다.” 도서관이 죽도록 방치됐다는 사실은 암흑시대가 이미 도래했음을 보여줬다.
그로부터 약 2,000년 뒤, 전혀 다른 상황에서 다시 어둠이 모여들고 있다. 한때 자랑스러운 문자사회 구성원이었던 미국인들은 예전보다 훨씬 덜 읽는다. 미국인의 독서 습관을 가장 포괄적으로 조사하는 전미예술기금에 따르면, [2022년에 어떤 종류의 책이든 읽었다고 답한 성인은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https://www.arts.gov/stories/blog/2025/men-women-split-reading-real-and-persists-amid-historical-rate-declines). 소설이나 단편을 읽은 사람은 38퍼센트뿐이었다. 미국 시간 사용 조사 응답 23만 6,000건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어느 하루에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는 미국인의 비율은 2004년 28퍼센트에서 2023년 16퍼센트로 떨어졌다](https://news.ufl.edu/2025/08/reading-for-pleasure-study/). 이 연구는 책, 잡지, 신문을 읽은 사람, 오디오북을 들은 사람, 전자책을 읽은 사람을 포함했다. 이제 도박은 책 읽기보다 더 흔한 여가 활동이 됐다. 지난해 미국인의 57퍼센트가 돈을 걸었다.
독서 감소는 연령, 성별, 교육 수준을 가리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가장 책을 많이 읽던 집단인 은퇴자, 여성, 대학 졸업자 사이에서도 독서는 무너졌다.
사람들이 읽는 책도 예전보다 단순해졌다. 오늘날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 베스트셀러의 문장은 [한 세기 전보다 약 3분의 1 짧다](https://www.economist.com/culture/2025/09/04/is-the-decline-of-reading-making-politics-dumber). 긴 문장이 본질적으로 더 낫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긴 문장이 예전에 널리 쓰였다는 사실은, 미국인들이 진지한 문학 작품을 읽고자 하는 의향과 능력을 갖춘 시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퍼블리셔스 위클리(Publishers Weekly)*에 따르면 1958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https://bookshop.org/a/12476/9780307390950) 영어 번역본은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었다. 파스테르나크는 길고 복잡한 문장을 썼다. “그 따뜻하고 잿빛인 산속 아침, 지바고는 차르가 불쌍하다고 느꼈고, 그토록 머뭇거리는 과묵함과 수줍음이 압제자의 본질적 특징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게 약한 사람이 누군가를 가두고, 교수형에 처하고, 사면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난해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은 *헝거 게임(Hunger Games)* 청소년 시리즈의 최신작인 [*해 뜨는 추수의 날(Sunrise on the Reaping)*](https://bookshop.org/a/12476/9781546171461)이었다. 뉴욕 공공도서관의 수석 사서 브라이언 배넌은 청소년 소설이 도서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분야 중 하나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분명히 청소년이 아닌 성인 독자도 포함된다. 상위 10위권의 다른 책으로는 아동서인 [*파티푸퍼(Partypooper)*](https://bookshop.org/a/12476/9781419782695), 곧 *윔피 키드(Diary of a Wimpy Kid)* 시리즈 20번째 권, 그리고 [*도그맨: 빅 짐은 믿는다(Dog Man: Big Jim Believes)*](https://bookshop.org/a/12476/9781546176183)가 있다. 성인을 위해 쓰인 소설 가운데 가장 인기 있었던 책은 로맨타지 모험물 [*오닉스 스톰(Onyx Storm)*](https://bookshop.org/a/12476/9781649377159)이었다. 그 책이 어떤 즐거움을 주든, 파스테르나크는 아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응시하자 네모난 턱의 근육이 씰룩였고, 거뭇한 수염이 난 뺨의 황갈색 피부가 물결쳤다.”
미국인은 예전보다 뉴스를 읽어서 접하는 비율도 훨씬 낮아졌다. 1975년에는 20대의 약 절반이 매일 신문을 읽는다고 답했다. 오늘날 그 비율은 10퍼센트 미만이다. 이제 대부분의 미국인은 휴대전화와 노트북으로 뉴스를 접한다. 40퍼센트는 온라인 뉴스를 읽기보다 보거나 듣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이 변화는 흔히 문해력 위기라고 불린다. 미국인의 기초 읽기 능력이 낮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4학년과 8학년의 읽기 점수는 지난 10년 동안 하락했다. 미국 학교도서관협회 이사인 어맨다 코델리스키는 학생들의 낮아진 읽기 수준에 맞추려고 자신과 동료 사서들이 새 책을 사야 했다고 말했다. 가장 인기 있는 책 가운데 일부는 그래픽노블이다. 초등학생을 위한 *매직 트리 하우스(Magic Tree House)* 시리즈 같은 고전의 최신판, 중고등학생을 위한 만화 등이 그렇다.
2024년 전국 시험에서 [고등학교 12학년 학생 가운데 35퍼센트만](https://nces.ed.gov/nationsreportcard/reading/achieve.aspx#2009_grade12) 복잡한 허구적 주제를 분석하고 저자 주장의 효과를 평가하는 능력에서 “숙련” 수준에 도달했다. 거의 같은 비율의 학생은 “기초” 미만을 받았다. 이는 글에 명시된 개념에서 결론을 끌어내거나, 문맥 단서를 활용해 모르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뜻이다. 성인 문해력 점수도 떨어졌다. 미국 성인의 거의 30퍼센트가 [여러 쪽짜리 글을 바꿔 말하거나 그 글에서 추론하지 못한다](https://ies.ed.gov/learn/press-release/u-s-adults-score-par-international-average-literacy-skills-below-international-average-numeracy-and). 2017년에는 이 수치가 20퍼센트 미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국인은 아마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단어를 읽고 있을 것이다. 달라진 것은 무엇을, 어떻게 읽느냐다. 사람들은 이메일, 문자 메시지, X 게시물, 레딧 스레드, 인스타그램 캡션에 폭격당한다. 이런 텍스트 조각의 폭발은 풍부하고 복잡한 정보를 전달하는 긴 글에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시간을 빼앗았다. UCLA의 인지신경과학자 메리앤 울프는 사람들이 글을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잃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개별 단어를 해독하는 법을 잊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이해와 종합이라는 고차 능력을 잃고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은 비문해 사회가 아니다. 탈문해 사회다.
상황은 곧, 그리고 빠르게 더 나빠질 것이다. 다음 세대는 오늘날의 어른들이 어린 시절 읽었던 것보다 훨씬 덜 읽는다. 예일대와 코네티컷대 해스킨스 글로벌 문해 허브 소장 벤저민 파워스는 유치원 교사들이 많은 학생이 동요나 동화를 모른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미국 성인 23만 6,0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어느 하루에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 사람은 2퍼센트에 불과했다. 재미로 책을 거의 읽지 않거나 전혀 읽지 않는다고 답한 13세의 비율은 1984년 8퍼센트에서 2025년 29퍼센트로 올랐다. 아이들은 한 살씩 나이가 들 때마다 독서를 덜 좋아한다.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의 프로그램 디렉터 로버트 타운센드는 최근 고등학생들에게 즐거움을 위한 독서를 어떻게 느끼는지 묻는 포커스그룹을 진행했다. 그는 대다수 학생이 그것을 낯선 관습처럼 여겼다고 말했다.
독서는 [사회의 최고 교육을 받은 구성원 일부에게조차](https://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2024/11/the-elite-college-students-who-cant-read-books/679945/) 부수적인 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하버드대 인문·사회과학 지원 담당 부국장 마거릿 레닉스는 고대 영어로 쓰인 책을 읽느라 힘들어하던 한 학생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했다. 문제의 책은 앤서니 버지스의 1962년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https://bookshop.org/a/12476/9780393341768)였다. 그 학생은 챗GPT를 사용해 책을 더 쉬운 말로 “번역”했다. 얼마 전 하버드의 한 사회학 교수는 학생들이 강의평가에서 배정된 빽빽한 읽기 분량에 불만을 드러내자 고민에 빠졌다. 그는 레닉스에게 수업에 와서 독서를 변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레닉스는 미국 최고 명문대 학생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더구나 그들은 기록된 관찰, 논증, 분석에 뿌리를 둔 학문 수업을 듣고 있었다. 발췌문과 요약문은 완전한 1차 텍스트의 깊이와 정교함을 담아낼 수 없다고 말이다. 레닉스는 일부 학생들이 이제 독서를 지식을 얻는 불필요하게 부담스러운 방식으로 본다고 말했다. “학생들에게 읽으라고 요구함으로써 교수들은 더 어려운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도록 강제하고, 그 결과 학생들에게서 정보를 자의적으로 감추는 셈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디 애틀랜틱(The Atlantic)* 삽화. 출처: 펭귄 북스.
169년 된 잡지의 필자가 독서를 옹호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위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탈문해 시대에 손해를 보는 사람은 말로 생계를 꾸리는 이들뿐만이 아니다. 독서는 단순한 기술도 아니고, 여러 의사소통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도 아니다. 우리가 서로 교류하는 데 쓰는 매체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빚는다. 초기 인류는 수천 년 동안 목소리만으로 소통했다. 읽기와 쓰기의 등장은 사회를 바꿔 놓았다. 사람들의 의식과 정치, 그리고 그들이 해낼 수 있는 지적 성취를 바꿨다. 독서의 쇠퇴도 같은 규모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생각, 사회의 정치와 문화, 우리가 문명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변화가 이미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독서는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글자를 단어로 엮고 그것을 현실 세계의 대응물과 연결하도록 설계된 선천적 인지 장치가 없다. 읽기 위해 사람들은 말하기와 사물 인식에 쓰이던 뇌 영역을 다른 용도로 전용해야 했다. 이 관습은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나타났다. 그 뒤 수천 년 동안 인구 대다수는 글을 읽지 못했다. 문해력이 대중적 현상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1440년 인쇄기를 발명한 이후의 일이다.
글말은 구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글은 메시지를 전달자에게서 떼어내므로, 구술사회에서 가능했던 것보다 더 냉정하게 정보를 퍼뜨릴 수 있게 한다. 한 구절을 쓰는 데는 말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에, 글쓰기는 저자에게 속도를 늦추고 성찰하도록 강요한다. 글말은 말보다 더 복잡한 문장 구조와 어휘를 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말과 달리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독자는 텍스트로 돌아가 새로운 의미와 이해를 파고들 수 있다. 글은 지속되기 때문에 개인은 자신이 쓴 내용을 잠시 잊어도 그것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라 믿을 수 있다. 이 덕분에 정신은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고 새로운 발견을 할 여유를 얻는다.
역사가이자 예수회 사제인 월터 J. 옹은 1982년 저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Orality and Literacy)*](https://bookshop.org/a/12476/9780415538381)에서 “그 어떤 단일 발명보다 글쓰기는 인간 의식을 변화시켰다”고 썼다. 그는 문해력이 내면의 집중, 지속적 주의, 논리적 추론의 조건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합리적이고 선형적이며 분석적인 새로운 종류의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옹은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르 루리야의 사례 연구를 인용했다. 루리야는 농민들이 기초적인 읽기와 쓰기 교육을 받기 시작하던 1930년대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지야의 외딴 마을을 여행했다. 그는 찻집, 들판의 야영지, 저녁 모닥불가에서 연구 대상자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문해 농민과 비문해 농민의 사고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질문을 던졌다. 루리야는 농민들에게 말했다. “극북 지방의 모든 곰은 흰색입니다. 노바야젬랴는 극북 지방에 있습니다.” 그런 다음 노바야젬랴의 곰은 무슨 색인지 물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농민들은 삼단논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글을 모르는 농민들은 시도하기를 거부했다. 북쪽에 가본 적이 없으니 답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문해력을 얻는 것은 단지 단어를 읽는 능력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전한 것처럼 보였다.
후대 학자들은 이런 새로운 사고방식의 일부를 독서만이 아니라 문해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른 측면의 결과로 돌렸다. 그러나 옹의 더 큰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쇄문화는 길고 조직적인 논증을 중시한다. 닐 포스트먼은 1985년에 이렇게 썼다. “글쓰기는 말을 얼려 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법학자, 논리학자, 수사학자, 역사가, 과학자를 낳는다. 이들은 모두 언어를 눈앞에 붙들어 두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디서 오류를 범하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읽기와 쓰기의 등장은 철학, 현대 과학, 학문으로서의 역사, 예술비평의 전제조건이었다.
이 변화는 엄청난 불안을 낳았다. 문해력이 사회에 퍼지면서 정치적 격변과 혁명에 기여했다. 미국 식민지에서 애국파 지도자들은 신문과 팸플릿을 이용해 반영국 정서를 부추겼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782년에 이렇게 썼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웅변가들은 자기 목소리가 닿는 범위 안에 모일 수 있는 시민 수만큼에게만 말할 수 있었다. 이제 인쇄술을 통해 우리는 여러 국민에게 말할 수 있다. 좋은 책과 잘 쓴 팸플릿은 크고 넓은 영향을 미친다.”
미국 건국자들은 인쇄된 문서를 사용해 새 나라를 세웠고, 자신들이 설계한 체제가 작동할 것이라고 믿었다. 시민들이 정보를 갖춘 독자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프랭클린 자신도 신문 발행인이었고 미국 최초의 대출 도서관을 세웠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도서관들은 미국인들의 일반적 대화를 향상시켰고” “평범한 장인과 농부를 다른 나라의 대다수 신사들만큼 지적으로 만들었다”고 썼다. 초기에 미국인들은 정보를 아는 일을 시민적, 나아가 도덕적 의무로 여기게 됐다.
물론 새 공화국이 언제나 냉철한 분석의 안식처였던 것은 아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신문에서 적을 공격했고, 거짓말을 퍼뜨려 대중이 반대자들에게 맞서도록 선동했다. 토머스 제퍼슨의 한 동맹자는 존 애덤스를 두고 “남자의 힘과 굳셈도, 여자의 부드러움과 감수성도 갖추지 못한 흉측한 자웅동체적 인물”이라고 불렀다.
독서에 대한 접근이 고르게 분배된 것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많은 미국인은 연방정부의 문해력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특히 남부에서는 흑인의 문해를 막는 일이 백인우월주의 정부의 기둥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문학은 많은 미국인에게 오락, 의미, 연결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그들은 성경과 영문학에서 나온 공통의 참조 체계를 공유했다. 찰스 디킨스는 미국 독자들에게 충분히 사랑받았다. 1842년 뉴욕 방문 중 그가 머리를 자르자, 숭배자들이 이발소로 몰려가 잘린 머리카락을 모을 정도였다.
19세기에 편지 쓰기는 하나의 예술 형식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조차 우아하고 격식을 갖춘 문체로 쓰였다. 컬럼비아대 언어학자 존 맥워터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보면 이상합니다. 남북전쟁 병사가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는 텐트 안에서 진흙투성이가 된 채 셰익스피어처럼 씁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게 되죠. *자기 아내한테도 좀 편하게 말할 수 없는 건가?(Can’t he loosen up with his own wife?)* 하지만 사실 그건 그가 아내에게 장미를 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새뮤얼 D. 라우히드는 실로 전투와 빅스버그 포위전에 참전한 북군 미주리 의용보병 제8연대에서 복무했다. 1862년 10월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썼다. “전장에서 자기 피를 뒤집어쓴 채 누워 죽는 것은 고통스럽소. 힘차게 뛰어오르는 군마가 자비 없는 발굽으로 죽어가는 자와 죽은 자를 짓밟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소. 위로의 말 한마디 해줄 사랑하는 아내도 곁에 없소.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픈 그 시간에 도움을 줄 살아 있는 누이나 어머니도 없소. 아, 인류여. 아, 전쟁의 참상이여.”
1962년 미디어 이론가들의 수호성인인 마셜 매클루언은 서구 세계가 그가 “탈문자적(post-literate)”이라고 부른 상태가 되리라고 예측했다. 그해 출간된 [*구텐베르크 은하계(The Gutenberg Galaxy)*](https://bookshop.org/a/12476/9781442612693)에서 그는 그런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고, 전자매체가 이미 글말을 대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가정의 90퍼센트가 텔레비전을 보유했다](https://www.theatlantic.com/technology/archive/2018/05/when-did-tv-watching-peak/561464/). 불과 10년 전의 9퍼센트와 비교되는 수치다. 텔레비전은 미국인의 주요 뉴스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평균 가구는 하루 다섯 시간 넘게 TV 앞에 앉아 있었다.
현재에서 바라보면 1950년대와 60년대의 미국은 탈문해처럼 보이지 않는다. 전후 미국은 놀라운 속도로 더 부유해지고 더 높은 교육을 받았다. 글말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지식인에 대한 숭배는 계속 커질 것처럼 보였다. 1964년, 당시 발행 부수가 300만 부를 넘던 *타임(Time)*은 교외의 불안을 어두운 우화로 그린 작가 존 치버를 표지 기사로 다뤘다. “오시닝의 오비디우스(Ovid in Ossining)”라는 제목의 그 기사는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의 기원문을 길게 인용하며 시작했다. 치버의 유명한 단편 “5시 48분(The Five-Forty-Eight)”에서 주인공은 제목의 그 열차에 오르고, 당시에는 익숙했지만 지금은 낯선 광경을 마주한다. 퇴근객으로 가득 찬 객차, 그리고 모두가 저녁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미국 생활의 리듬과 습관을 바꾸고 있었다. 1985년, 매클루언의 친구이자 제자인 포스트먼은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https://bookshop.org/a/12476/9780143036531)를 출간했다. 그는 텔레비전이 미국인의 주의를 납치하고 정치를 싸구려 오락으로 바꿔 놓았다고 주장했다. 포스트먼은 이렇게 썼다. “문제는 텔레비전이 우리에게 오락적인 주제를 제시한다는 데 있지 않다. 모든 주제가 오락적인 것으로 제시된다는 데 있다.” “텔레비전은 우리 문화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주된 방식이다.” 당시 미국의 평균 가구는 매일 7시간 넘게 텔레비전을 봤고, 이 수치는 2010년 무렵 거의 9시간까지 올라갔다.
TV가 독서에 필요한 조용한 시간을 밀어냈다면, 광대역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그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는 집에서 즐기는 화면 오락이 유한했다. 프로그램은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방영됐다. 옛 영화를 보고 싶으면 신발을 신고 비디오 가게에 가야 했다. 책은 그런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어떤 사람들은 TV를 끄고 잠들기 전 책을 읽었다.
이제 오락은 무한하다. 뚜렷한 끝이 없다. 한 프로그램이 다음 프로그램으로 흘러 들어간다. 사람들은 손에 휴대전화를 든 채 TV를 보며 소셜미디어를 확인하거나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는다. 보도에 따르면 넷플릭스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관객이 집중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라](https://variety.com/2026/film/news/matt-damon-netflix-movies-restate-plot-viewers-on-phones-1236633939/)고 말했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시청자에게 계속 상기시키라고 했다. 이런 환경에서 책을 읽으려면 정말 단단히 마음먹어야 한다.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읽을 때조차 정보를 덜 흡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휴대전화로 읽을 때 특히 그렇다. 끝없는 스크롤, 하이퍼링크, 알림은 표면적인 읽기를 유도하며 끊임없이 다른 곳을 보라고 부른다. 연구들은 사람들이 종이보다 디지털 기기에서 읽을 때 이해도가 낮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아마 이런 산만함 때문일 것이다. 글에 길고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이제 과도한 요구처럼 느껴질 수 있다. 오디오북이 인쇄책의 인기 있는 대안이 된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책을 들으면 여러 일을 동시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하거나 출근길 운전을 하면서도 읽을 수 있다.
주의 지속 시간이 줄고 이해력이 낮아지는 상황에서 학교는 짧은 지문과 얕은 읽기로 향하는 충동에 저항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교는 오히려 그것을 부추겼다. 2025년 조사에 따르면 중·고등학교 영어 교사 대다수는 [1년에 책을 0권에서 4권 배정했다](https://www.rand.org/pubs/research_reports/RRA4594-4.html). 잇따른 교육 개혁은 학군들이 온전한 책보다 짧은 지문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객관식 독해 시험을 더 잘 흉내 내기 위해서였다. 지금 가장 인기 있는 학교 교육과정 다수는 발췌문에 의존한다. 캘리포니아 코로나의 한 초등학교 교장 애너마리 코르테스는 많은 관리자들이 교사들에게 온전한 책을 배정하지 말라고 지시한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짧은 발췌문으로 분리된 읽기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디지털 기기는 미국 교실을 뒤덮었다.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 조사에서 [초등학교 교사의 80퍼센트 이상은 학생들이 유치원에 들어갈 때쯤 학교 지급 기기를 받는다고 답했다](https://www.nytimes.com/2025/11/12/upshot/teachers-survey-chromebooks-class.html). 텍사스 덩컨빌의 프리케이에서 세 살 아이들을 가르치는 루피타 비야로보스는 학군이 학교에서 쓰도록 학생마다 태블릿을 지급한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이 집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기 앞에서 보내는지 알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 기기를 쓰지 못하게 했다. “학교에 적응하는 데 아주 격한 반응을 보인 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보통 학생들은 처음 몇 주 정도 울면서 엄마를 찾죠. 그런데 그 학생은 태블릿 때문에 울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적어도 온라인에서 뭔가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한때 주로 텍스트 기반이던 소셜미디어는 짧은 영상에 점령당했다. 틱톡,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가 주의 경제를 지배한다. 특히 젊은층에서 그렇다. 세대 변화를 연구하는 심리학 교수 진 트웬지의 최근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8학년이 되면 평균적인 아이는 [하루 4시간 30분을 소셜미디어에 쓴다](https://www.generationtechblog.com/p/the-mind-blowing-amount-of-time-teens). 그 시간의 상당 부분 동안 아이들은 영상을 본다. 종종 2배속으로 본다. 문자 메시지조차 구어의 특징을 띠게 됐다. 사람들은 감정의 고조를 나타내려고 모두 대문자를 쓰고, 이제 딱딱하고 심지어 엄격해 보이는 정확한 구두점의 격식을 피한다. 많은 20대처럼 나와 내 친구들도 문자에서 대체로 멀어졌고, 서로 음성 녹음을 보내는 것을 선호한다.
글말은 수천 년 동안 살아남았고 새로운 기술의 잇따른 도전을 이겨냈다. 분명 회복력이 있다. 독서율은 오르내릴 수 있지만, 낙관론자들은 역사의 긴 호가 보편적 문해를 향한다고 주장한다. 하버드대 비교문학 교수 마틴 푸흐너는 문학이 역사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연구한다. 그는 의사소통 기술이 어떻게 변했고 그 변화가 어떤 공포를 불러일으켰는지 수십 년간 추적해 왔다. 그의 경력 대부분 동안 그는 독서의 종말을 둘러싼 두려움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글쓰기 기술 변화의 긴 역사가 제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종말론적 시나리오에는 언제나 저항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푸흐너조차 종말론적 시나리오가 도래했다고 믿는다. 영상에서 벗어나 텍스트로 돌아가는 일은 몹시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매클루언과 포스트먼이 우리 사회가 탈문해가 되리라고 예측한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단지 빨랐을 뿐이다. 이 이론가들이 반세기 전에 내다본 세계가 이제 여기에 있다. 문해 시대는 구술 시대와 디지털 시대 사이의 짧은 막간으로 드러날 것이다.
독서는 근대적 정신을 빚었다. 그것이 사라지면 정신도 다시 빚어질 것이다. 인지과학자들은 이런 변화가 어떤 모습일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 12명에게 우리가 독서를 멈추면 뇌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물었다. 몇몇은 내 기초적인 질문을 재미있어했다. 버지니아대 교수 댄 윌링엄은 내게 말했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뇌를 바꿉니다. 문자 그대로 단어 하나를 읽는 것만으로도 뇌는 적어도 몇 시간 동안 바뀝니다. 제대로 측정할 줄 안다면 그보다 훨씬 오래 바뀌죠.”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모든 것이 뇌를 바꾼다면, 거의 어떤 단일 행동도 그리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한 종류의 행동, 곧 단어 읽기를 다른 행동, 곧 인스타그램 릴스 보기로 지속적으로 대체한다면 어떨까? 신경과학에서 가장 견고한 발견 가운데 하나는 사람의 뇌가 연습하는 것을 숙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책 대신 짧은 영상으로 시간을 채우면 읽기 능력은 위축된다. 이해를 돕는 배경지식도 줄어든다. 자발적인 대규모 문맹 사태가 일어날 위험은 없다. 그러나 독서가 길러주는 복잡한 인지 능력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마음의 도서관이 황폐해진다.
책 읽기는 주의 지속 시간을 단련하는 운동이다. 더 많이 읽을수록 읽기는 쉬워지고, 새로운 이해라는 보상을 더 많이 얻는다. 결국 그 과정은 어려움보다 즐거움이 커진다. 하지만 신체 운동과 마찬가지로 그 반대도 참이다. 덜 읽을수록 읽기는 더 어려워지고, 지식을 얻는 길은 더 험해진다.
소셜미디어는 즉각적인 만족을 준다. UT 사우스웨스턴 의료센터의 소아과 교수 존 허튼은 틱톡을 스크롤하는 일을 버튼을 누르면 코카인 한 투여량을 받는 실험실 쥐에 비유한다. 결국 하고 싶은 일은 버튼을 누르는 것뿐이 된다. UC 어바인의 심리학자 글로리아 마크는 2004년 화면에서의 평균 주의 지속 시간이 2분 30초였다고 말했다. 2012년에는 75초로 떨어졌다. 5년 전에는 약 47초까지 내려갔다. 마크는 말했다. “우리는 콘텐츠가 빠르게 바뀌는 데 익숙해집니다.”
영상 보기는 독서보다 더 수동적인 참여 방식이다. 허튼은 최근 3~5세 아이들이 서로 다른 형식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동안 뇌 영상을 수집했다. 아이들이 이야기의 애니메이션 영상을 볼 때, 오디오 녹음을 들으며 정적인 삽화를 볼 때보다 상상과 관련된 뇌 영역을 절반 정도만 사용했다. 아이들은 영상을 볼 때 학습과 관련된 뇌 부위인 소뇌도 덜 사용했다. 허튼은 내게 말했다. “화면에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아이들은 상상력을 그만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삽화와 비교하면, 애니메이션에서 보는 것을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 뇌가 하는 일이 더 적은 겁니다.”
역설은 영상이 텍스트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는 데 있다. 언어뿐 아니라 소리와 움직이는 이미지까지 담고 있다. 그러나 영상은 더 깊은 사고를 자극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상은 너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시청자에게 밀어 넣어, 그중 어느 하나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다. 시청자가 얼마나 알아차렸거나 이해했는지와 상관없이 프레임은 계속 바뀐다. 자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것을 곱씹으려고 일시정지하고 되감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어디에나 짧은 영상이 있는 세계가 아닌 곳을 경험한 적이 없다. 다른 연구들에서 허튼은 화면 시간이 많고 독서 시간이 적은 아이들이 실행기능과 언어에 관련된 영역의 백질 발달이 덜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그 아이들이 그런 능력을 쓰는 데 덜 익숙하다는 뜻이다. 해스킨스 글로벌 문해 허브의 벤저민 파워스는 초등학교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집중을 유지하는 능력이 약하고 정신적 노력에 대한 인내심이 낮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교실에서는 정보를 해독하거나 찾아낼 수는 있지만, 추론과 종합, 긴 글 전반에 걸쳐 생각을 머릿속에 붙들어 두는 이해에는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로 나타납니다.”
2024년 3~8학년 교사 대상 조사에서 80퍼센트 이상은 학생들의 [읽기 지구력이 2019년 이후 낮아졌다](https://www.edweek.org/teaching-learning/how-to-build-students-reading-stamina/2024/01)고 답했다. ACT의 읽기와 영어 영역 점수는 지난 7년 동안 하락했다. 지금은 30여 년 만에 최저 수준이다. SAT 읽기와 쓰기 점수도 떨어졌다. 시험 관리자들이 독해 능력을 평가하는 지문을 더 짧고 단순하게 만들었는데도 그렇다.
이 학생들이 대학에 가면 교수들은 그들에게 텍스트를 이해하는 법, 다시 말해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브라운대 독일학 교수 조너선 파인은 내게 말했다. “저는 독일어로 가르치기 때문에 늘 학생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는 데 익숙했습니다. 영어학과 사람들이 이제 자신들도 해야 한다고 깨닫고 있는 바로 그 일입니다. ‘더 큰 요점이 무엇인가?’로 가기 전에도 먼저 ‘이게 반어인가?’, 은유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그 단어와 문법을 이해하게 하고 모든 것을 알아차리게 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그래야 바라건대 더 큰 연결을 만들 수 있습니다.”
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고등교육은 거의 틀림없이 더 보충교육적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2024년에 발표된 [캔자스의 두 지역 대학 영어 및 영어교육 전공자 연구](https://muse.jhu.edu/issue/52221)에서 연구자들은 학생들에게 디킨스의 [*황폐한 집(Bleak House)*](https://bookshop.org/a/12476/9780141439723) 첫 일곱 문단을 읽게 했다. 이 소설은 잔디스 집안 구성원들이 유산을 둘러싼 긴 법적 분쟁을 겪는 이야기를 따라간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 런던. 미카엘마스 법정기가 막 끝나고, 대법관은 링컨스 인 홀에 앉아 있다. 가차 없는 11월 날씨. 마치 물이 이제 막 지표면에서 물러난 듯 거리에는 진흙이 가득하다. 홀번 언덕을 코끼리 같은 도마뱀처럼 뒤뚱거리며 올라가는, 길이가 40피트쯤 되는 메갈로사우루스를 마주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연구자들은 학생들이 이 대목을 해석하려 한 말을 인용했다.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음, 진흙이 거리에 다 있고, 우리는, 아니 … 그러니까 모든 게, 약간, 여기저기 씻겨 내려갔고 메갈로사우루스 뼈를 찾을 수도 있는데, 그는 그게 뒤뚱거린다고 말하고, 음, 언덕 위로 쭉 올라간다는 거죠.” 대상자의 적어도 4분의 1은 비유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 그래서 19세기 런던 거리를 공룡이 걸어 다녔다고 추론했다. 디킨스는 이어 대법관이 “무성한 구레나룻, 가느다란 목소리, 끝없는 소장을 가진 덩치 큰 변호사”에게 말을 듣고 있다고 묘사한다. 또 다른 학생은 이 대목을 “어떤 동물과 함께 방 안에 있는 그를 묘사하는 것 같아요? 무성한 수염? 고양이?”라고 해석했다.

*디 애틀랜틱(The Atlantic)* 삽화. 출처: 채프먼 앤 홀.
학생들이 낯선 참조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학생들에게 인터넷 전체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원했다면 *미카엘마스 법정기(Michaelmas term)*나 *대법관(Lord Chancellor)*, *링컨스 인 홀(Lincoln’s Inn Hall)*을 검색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알아내야 하는지조차 몰랐거나,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대다수는 이 장면이 법정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읽은 내용을 정확하고 자세히 이해한 학생은 5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변화는 대학 캠퍼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논리 문제에 답하고, 효과적으로 추론하며, 패턴을 분석하는 미국 성인의 능력은 2006년부터 2018년까지 낮아졌다. 미국 성인은 반세기 전 같은 교육 수준의 사람들보다 어휘력도 더 낮은 경향이 있다. 최근 연구들은 1930년대 이후 세대 간 IQ가 꾸준히 상승해 온 현상인 플린 효과가 [지난 20년 동안 역전됐다](https://nymag.com/intelligencer/article/american-adult-lower-iq-scores-cognitive-decline-technology-flynn-effect.html)고 시사한다. 노스웨스턴대 의대 연구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드워랙은 평균 IQ 점수가 10년마다 약 3점씩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인지 변화가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드워랙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은 특정 형태의 공간 추론에서 향상되고 있다. 탈문해 문화는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이점을 줄 수도 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edrus)*에서 소크라테스는 글쓰기의 등장이 “배우는 이들의 영혼에 망각을 낳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기억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문자 기호를 믿고 스스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유명하게 주장한다. 그는 옳았다. 그러나 미디어 이론가 안드레이 미르가 관찰했듯, 글쓰기는 개인의 기억을 약화시킨 동시에 사회의 집단 기억을 향상시켰다.
끝없는 영상 피드에 뇌를 연결한 채 자라는 세대가 어떤 새롭고 아직 감지되지 않은 인지적 탁월함을 발달시키고 있을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독서의 쇠퇴가 덜 합리적이고, 덜 분석적이며, 덜 정교한 사고방식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서 어떤 이점을 보기는 어렵다.
1982년 월터 J. 옹은 현대 문명이 “2차 구술성(secondary orality)”의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고 보았다. 한때 문해적이었던 사회가 문자 이전 문화의 일부 관습으로 되돌아가는 상태다. 말은 발화되는 즉시 사라지기 때문에, 구술문화는 기억을 돕기 위해 반복을 중시한다. 구술사회에서 음유시인들은 생각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상투구와 기억술을 사용한다. 옹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별칭과 “신체적 폭력에 대한 열광적 묘사”를 다룬다. 갈등이 냉정한 논의보다 더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은 글 쓰는 사람처럼 말을 편집할 수 없으므로,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간다. 나중에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더라도 청중이 앞선 발언을 기억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의미는 객관적 진리라는 개념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정체성에 달려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Orality and Literacy)*를 숙지했을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그가 읽었다면 옹의 묘사 속에서 자신을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트럼프의 의사소통 방식은 구술사회에 완벽하게 맞는다. 그는 “기운 없는 젭(Low-Energy Jeb)”, “꼬마 마코(Little Marco)”, “졸린 조(Sleepy Joe)”처럼 기억하고 반복하기 쉬운 별칭을 쓴다. 그는 자신의 이전 발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스스로를 모순시킨다. 그의 글쓰기조차 말하기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그럴 만도 하다.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글을 직접 쓰기보다 받아쓰기를 선호한다. 그의 온라인 게시물에는 독특하게 놓인 구두점, 대문자, 느낌표가 가득하다. 텍스트가 거의 없는 밈도 많다. 한 게시물에는 미국 군함이 레이저빔으로 이란 항공기를 맞히는 이미지와 함께 “레이저: 빙, 빙, 사라짐!!!”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트럼프는 우리의 첫 탈문해 대통령이다. 정보가 주로 텍스트를 통해 퍼지는 나라에서 그가 지도자로 선출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2024년 대선을 앞두고 NBC 뉴스가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신문을 읽는 응답자 사이에서는 조 바이든이 트럼프를 49포인트 앞섰다. 트럼프는 산만하고 논쟁적인 우리 시대를 이용하는 의사소통 방식을 개척했다.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 명예 커뮤니케이션학 교수 로더릭 하트는 내게 말했다. “학계와 언론계의 특히 많은 사람이 그를 정치적 혁명가로 봅니다. 저는 그를 훨씬 더 수사학적 혁명가로 봅니다.”
1985년 저서 [*장소감의 상실(No Sense of Place)*](https://bookshop.org/a/12476/9780195042313)에서 미디어 이론가 조슈아 마이로위츠는 텔레비전과 다른 전자매체가 미국인들에게 잠재적 지도자들에 관한 새로운 종류의 정보를 쏟아부었다고 보았다. 인쇄매체는 대중에게 정치인의 다듬어진 발언만 보여줬다. 영상은 미국인들이 대통령이 땀 흘리고, 재채기하고, 말을 더듬는 모습을 보게 했다. 마이로위츠는 유권자들이 “이력서 기준” 대신 “연애 상대 기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마이로위츠는 *장소감의 상실(No Sense of Place)*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날 권위자들은 과거보다 더 자주 글을 잘 쓰고 추론을 잘하기보다 ‘보기 좋고 듣기 좋게’ 보여야 한다.” 그는 인쇄의 쇠퇴와 전자매체의 부상이 결국 사람들을 포퓰리스트 지도자 쪽으로 밀어붙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람들은 권위와 제도 대신 텔레비전 화면에서 돋보이는 후보를 택할 것이다. 그는 전직 배우 로널드 레이건이 재선에 성공한 직후 이 책을 출간했다.
마이로위츠는 말했다. “최근 그 책을 다시 읽었는데, 계속 *젠장, 내가 썼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맞는 말이잖아(Holy shit, this is even more true than when I wrote it)*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미국인들에게 대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전례 없는 기회를 준다. 그 알고리즘은 복잡성, 뉘앙스, 엄밀함보다 단순하고 선동적이며 감정적으로 와닿는 콘텐츠에 보상을 준다. 정치에 대한 통속 이론에 맞는 생각들, 곧 *모든 지도자는 똑같이 부패했다(all leaders are equally corrupt)*,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훔친다(immigrants steal jobs)*, *정책 문제에는 쉽고 상식적인 해결책이 있다(policy problems have easy, commonsense solutions)* 같은 생각이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발견보다 우세해진다.
우파와 좌파의 정치인들은 이 새로운 플랫폼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알아냈다. 보수 성향 맨해튼 연구소의 대표 레이한 살람은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설명했다. 그는 말했다. “적을 하나 지목하고 대중을 양극화합니다. 뉘앙스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권력 투쟁 중일 때 뉘앙스는 그저 혼란일 뿐이니까요.”
제도와 엘리트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정치인은 이런 상황에서 더 잘나간다. 살람은 말했다. “사실 모든 것이 정말, 정말 단순하고, 카리스마 있는 한 사람이 시각적으로도 강렬하고 감정적으로도 강렬한 승리를 그냥 이뤄낼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이야말로 건국자들이 잘 읽은 대중이라면 간파하리라 기대했던 선동가의 모습이다. 살람은 말했다. “우리의 헌정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도록 의도됐는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 질서와 완전히 배치됩니다.”
마셜 매클루언은 한때 [이렇게 말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Tx2ed93_Lpc&t=1508s). “자유주의 세계는 정의상 문해적이다.” 그 반대도 참인 듯하다.
트럼프가 첫 탈문해 대통령이라면, 그는 마지막이 아닐 것이다. 버락 오바마 대선 캠페인의 설계자 가운데 한 명인 정치 전략가 데이비드 플루프는 최근 [후보들이 매일 콘텐츠 제작에 집중해야 한다](https://www.nytimes.com/2026/04/05/opinion/politics-midterms-tiktok-attention-content.html)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아이디어를 화면에 중독된 유권자가 집중할 수 있을 만큼 짧은 것으로 줄이라고 조언했다. 플루프는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인스타그램 게시물이나 10초짜리 틱톡으로 전달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라.” 탈문해 시대에 공직 선거를 치르는 방법으로는 아주 좋은 조언일 수 있다. 하지만 정보에 입각한 자치의 실천 방식으로는 재앙을 예고한다.

*디 애틀랜틱(The Atlantic)* 삽화. 출처: 펭귄 북스.
나는 아직 인공지능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여러 디지털 기술은 주의를 납치했고 집중 독서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생성형 AI는 글쓰기의 지속적 존재를 위협하는 첫 도구다.
글쓰기는 어렵다. 조지 오웰은 그 경험을 “고통스러운 질병을 오래 앓는 것”에 비유했다. AI는 간단한 치료법을 약속한다. 문제는 글쓰기가 완성된 생각을 옮겨 적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글쓰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는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내고, 그 생각을 이미 공유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어떻게 전할지 찾아내는 방식이다. 조지타운대 컴퓨터과학 교수 칼 뉴포트는 글쓰기 과정이 사람들에게 질서 있고 선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강제한다고 주장한다. 글쓰기는 흐릿한 생각과 허술한 추론을 드러낸다. 생각을 단어, 문장, 문단으로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집중은 저자가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새로운 통찰을 발견하게 한다.
내게는 이 말이 참처럼 느껴진다. 내 직업은 글쓰기다. 오웰에게는 미안하지만, 고통스러운 질병의 가능성보다 빈 페이지가 더 두렵다. 그러나 그 고투에는 만족이 있다. 글쓰기 과정은 내가 형체 없는 생각을 다듬고 형식화하며 새로운 이해를 얻는 방식이다. 내 주장을 평가하고 설득력 없는 주장을 버리면서 설득력 있는 주장을 찾아낸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글 쓰는 사람이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AI가 그 어려움을 없앤다면 배움도 함께 없앤다.
초기 연구들은 사람들이 AI를 사용해 글을 쓸 때 정확히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시사했다. 과정은 더 쉬워진다. 결과물은 종종 혼자 쓴 것보다 더 낫다. 그러나 그 대가로 정신적 발달이 희생된다. 브라질의 한 연구는 공부에 AI를 사용한 대학생들이 AI 없이 공부한 학생들보다 불시 시험에서 훨씬 낮은 성적을 냈다고 판단했다. 학생들은 특정 지식이 아니라 성찰과 노력을 요구하는 문제에서도 또래보다 뒤처졌다. 영국의 수백 명을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연구는 인지 과제에서 AI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비판적 사고 능력과 부정적으로 연관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현대 생활은 지루한 글쓰기를 많이 요구한다. 그중 일부는 큰 비용 없이 기계에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의 역사적 도입을 연구해 온 뉴포트는 한 문제를 자동화로 없애면서 다른 문제를 만들지 않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게 됐다. 사람들은 거듭 하나의 성가신 과제를 우회하려고 도구를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게 말했다. “그러면 예기치 못한 2차 효과가 온갖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메일은 팩스, 전화, 회의를 대신하는 더 편리한 수단이 될 예정이었다. 대신 이메일 답장은 그 자체로 엄청난 시간 낭비가 됐다. 이런 예기치 못한 결과는 결국 지적 생활을 변화시킨다.
인구의 상당 부분이 글쓰기를 피하려고 AI를 사용하는 세계에서는 깊이 생각하는 능력이 점점 더 희귀해질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그 능력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AI는 텍스트의 과잉을 만들어내고 있다. 챗GPT가 출시된 2022년 이후 아마존에서 매달 출시되는 책의 수는 세 배로 늘었다. 같은 기간 과학 학술지 투고도 급증했다. 많은 글은 적어도 일부가 인공지능으로 작성됐다.
AI는 말끔하고 전문적인 산문을 만들어낸다. 인간이 쓴 텍스트와 AI가 만든 텍스트를 나란히 제시하면, 문예창작 석사 과정 학생들조차 기계의 작업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AI 글쓰기가 기분 좋고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해도, 그것은 독창적이지 않거나, 자주 부정확하거나, 둘 다다. 따라서 사람들에게는 분별력과 이해력이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떻게 스스로 판단할지 알아야 한다. 바로 이 능력들이 AI 사용으로 약화될 위험에 놓여 있다.
위험에 처한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대신해 글을 쓰도록 AI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 자기 견해를 따져 묻거나 심지어 발전시키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핵심 능력이다. 뉴욕대 철학자 콰메 앤서니 아피아는 내게 말했다. “우리가 그것들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기를 멈출 겁니다. 우리는 매우 다른 존재가 되겠죠.”
126년 전, *디 애틀랜틱(The Atlantic)*은 아서 리드 킴볼의 에세이를 실었다. 그는 “현대 미국 생활에서 이의를 제기받지 않은 변화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 중 하나”를 묘사했다. 미국 시민이 글을 잘 쓰고 깊이 생각하는 능력이 공격받고 있었다. 웅변과 지속적 주의의 적은 무엇이었을까? 신문이었다. 킴볼은 「[저널리즘의 침공(The Invasion of Journalism)](https://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1900/07/the-invasion-of-journalism/636300/)」에서 스포츠면과 가십 칼럼, 잡다한 기사와 속어를 갖춘 일간지가 책과 문예지를 가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문을 읽는 이유가 워싱턴이나 유럽의 긴박한 사건을 알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먼저 “흥미로운 ‘이야기’”로 눈을 돌릴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기묘한 자전거 모험담, 어쩌면 영리한 강도의 체포담 같은 것 말이다.
신문 이전에는 소설이 좋은 독서 습관과 도덕적 품격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토머스 제퍼슨은 여성을 교육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소설에 대한 열정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이 여성을 “건전한 독서”에서 유혹해 떼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일단 소설에 빠지면 “상상의 온갖 허구로 치장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주의를 끌 수 없다”고 썼다.
오늘날 독서에 가해지는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들은 이 오래된 전통을 지적한다. 어떤 새로운 기술이나 매체가 미국인을 산만하게 하고 타락시킨다고 비난하는 전통 말이다. 어쩌면 126년 뒤 이 에세이도 그런 근심의 최신 사례처럼 보일지 모른다. 이런 탄식을 되돌아보면서 나는 낡은 방식에 가장 깊이 투자한 사람들이 대개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고 가장 빨리 예언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적어도 몇몇 지표로 보면 책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 지난해 인쇄책 판매량은 10년 전보다 많았다. 반스앤드노블은 [새 매장을 60곳 넘게 열었다](https://www.theatlantic.com/ideas/2026/03/barnes-noble-popularity/686369/). 2025년에는 독립서점이 거의 400곳 생겨났다. 서브스택에서는 장문 글 구독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두아 리파와 리스 위더스푼 같은 유명인들은 자신의 명성과 영향력을 이용해 엄청난 성공을 거둔 북클럽을 시작했다. 오디오북은 10억 달러 규모 산업이 됐다.
하지만 낙관론자들은 데이터의 중요한 실마리를 놓친다. 텍스트는 점점 줄어드는 인구 비율 안에서 번성하고 있다. 지난해 읽힌 모든 책의 80퍼센트 이상은 성인의 20퍼센트가 읽었다. 러트거스대 독서사 연구자 리아 프라이스는 내게 말했다. “독서는 우표 수집이나 난초 기르기 같은 일종의 틈새 취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20년 전보다 하루에 더 많은 시간을 독서에 쓴다. 그들은 선배 독자들보다 인쇄물에 더 열정적인 듯하다. 그러나 텍스트에 헌신하고, 글말에서 문화적 이해와 지적 연결을 얻는 사람들은 이제 하위문화의 일부다. 당신이 이 기사를 읽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틀림없이 당신이 그 구성원이라는 뜻이다.
이제 독자가 되는 일이 선택 사항이 되면서, 그것은 정체성 표지로 기능할 수 있다. 열차에서 누군가 인쇄물을 읽는 모습을 보면 하나의 선언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필연적으로 그런 선언은 온라인 조롱의 소재가 됐다. 공공장소에서 책을 너무 과시적으로 들고 있으면 “과시적 독서”를 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이 딱지는 그 사람이 자신이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더 우월한 문학 취향을 지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고 전제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굳이 책을 들고 다니겠는가?
우리는 이런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사회가 처음 구술성에서 문해로 전환했을 때,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 귀중한 능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특권적 지위를 차지했고 후한 보수를 받았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상주 학자들은 도시의 왕실 구역에서 살았다.
오늘날 독서는 다시 인구의 작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문필가라는 사실은 예전만큼의 지위를 주지 않는다. 남은 독자들은 주변화되고, 조롱받으며, 여러 면에서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됐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문자에 기대는 삶은 경제적 막다른 길이다. 신문업계 고용은 [지난 20년 동안 75퍼센트 줄었다](https://www.washingtonpost.com/business/2024/07/12/news-reporters-journalism-jobs-census/). 인문학 분야의 학계 일자리도 마찬가지로 감소하고 있으며, 남은 자리 가운데 정년트랙은 점점 줄고 있다. 2024년 대학 졸업생 가운데 인문학 분야 학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8퍼센트에 불과했다. 그해 영어과와 역사학과가 수여한 학위 수는 2012년보다 각각 40퍼센트 적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패널과 학회에서 속삭이는 두려움이 있다. 자신들이 과거를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마지막 세대가 되리라는 두려움이다.
수백만 미국인이 읽는 인쇄 시사주간지 표지에 인기 문학인이 등장한다는 생각은 오늘날 상상할 수 없다. 그런 인물도 없고, 그렇게 널리 읽히는 시사주간지도 없다. 대신 많은 미국인은 자랑스럽게 탈문해적이다. 대통령은 글머리표로 된 보고를 좋아한다고 말한 바 있고, 보좌진은 그가 그림과 도표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세계 최고 부자들은 X 게시물, 팟캐스트, 챗봇과의 대화에서 정보를 얻는다고 자랑한다. 부와 영향력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은 그들을 흉내 내라는 권유를 받는다.
문화적·경제적 권력은 가장 인기 있는 의사소통 기술을 잘 쓰는 사람들에게 흐르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그런 사람들은 스트리머, 팟캐스터, 인플루언서다. 조 로건은 기자들이 꿈만 꿀 수 있는 규모의 청중을 거느린다. 그는 스포티파이 팔로워가 1,400만 명이 넘고 유튜브 구독자는 2,000만 명이 넘는다. 실제판 *오징어 게임(Squid Game)* 같은 정교한 스턴트를 벌이는 유튜버 미스터비스트는 정기적으로 수억 회의 조회 수를 기록한다. 아이쇼스피드와 더번트피넛 같은 비디오게임 스트리머들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디어 인물들에 속한다. 이 인물들은 젊은이들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말하는지, 심지어 어떻게 말하는지까지 빚는다.
책은 한때 지식, 기억, 지혜, 도덕의 필수 원천이었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책이 나이 든 세대에 의해 쓰이고 젊은 세대에게 전해지는 문화의 수직적 전달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이제 정보는 수평으로, 젊은 사람에게서 젊은 사람에게로 이동한다. 이런 역학은 미스터비스트와 더번트피넛 같은 인물을 미국 문화의 수호자로 만든다. 독서의 쇠퇴는 세계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 세계를 옆으로 돌려놓았다.
젊은이들은 자신을 엘리트로 도약시킬 직업을 추구하고 싶어 한다. 오늘날 그것은 성인이 되어가는 사람들이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2023년 모닝컨설트 여론조사에서 Z세대 응답자의 거의 60퍼센트는 가능하다면 소셜미디어 유명인이 되겠다고 답했다. 미국 학교도서관협회의 어맨다 코델리스키는 오클라호마의 사서이기도 하다. 그는 학생들을 위해 녹음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그는 내게 말했다. “팟캐스팅이 가장 뜨겁고 가장 인기 있는 것입니다. 마이크를 100만 개 사도 오디오 실험실에 들어가려면 대기자가 있을 겁니다. 모두가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 합니다.”
9월, 시러큐스대는 크리에이터 경제 센터를 출범시켰고, 곧 인플루언서를 꿈꾸는 학생들을 위한 첫 부전공을 개설할 예정이다. 이 대학 뉴하우스 공공커뮤니케이션스쿨 학장 마크 J. 로다토는 보도자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센터는 현재 학생과 예비 학생의 열망에 직접 말을 겁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고, 다가오는 세계에서 앞서가도록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그 세계의 도래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지 알아차렸고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거의 20여 개 주가 수업일 동안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했다. 텍사스의 금지 조치가 지난 학년도 초에 시행된 뒤, 댈러스의 한 학군에서는 [전년보다 도서관 책 대출이 20만 권 늘었다](https://www.cbsnews.com/texas/news/dallas-isd-calendar-school-library-book-checkout-report-texas-cellphone-ban/). 거의 25퍼센트 증가한 수치다. 시카고 교외의 고등학교 영어 교사이자 전국영어교사협의회 회원인 렉스 오발레는 발췌문에 대한 반발을 보았다고 말했다. 일부 교사는 온전한 책을 교육과정에 다시 넣고 있다. 클리블랜드 공공도서관의 사무총장 펠턴 토머스 주니어는 가장 어린 이용자들이 노년층과 함께 디지털 사본보다 인쇄책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탈문해 문화에 맞서는 이런 저항 행위가 헛돼 보인다 해도, 버티는 사람들은 시도한다고 잃을 것이 없다.
나는 탈문해 시대에 자랐다. 닷컴 버블이 터진 직후 태어났고, 아이폰이 출시될 무렵 1학년에 들어갔다. 7학년 때 첫 휴대전화를 얻었고 곧바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당신이 인터넷 밈을 언급한다면, 어떤 인터넷 언급이든, 나는 유감스럽게도 거의 언제나 알아들을 것이다. 독서를 전제로 한 세계에 관해 내가 아는 대부분은 책에서 읽은 것이다.
나는 독서가 있는 가정에서 자라는 이점을 누렸다. 아버지는 중학교 때까지 거의 매일 밤 내게 책을 읽어줬다. 변덕스러운 딸을 둔 아버지로서 그는 종종 내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우리가 함께 책을 읽을 때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빌릴 수 있었다. 언니들은 나를 자기들의 북클럽에 끌어들이고 싶어 안달이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한 책은 버려진 기차 객차에 집을 만드는 네 고아 남매 이야기 *박스카 아이들(The Boxcar Children)*이었다. 책에서 아이들은 먹을 것과 잠자리도 간신히 찾았지만, 두 자매는 곧바로 어린 남동생에게 글을 가르치기로 한다. 그들은 나무 조각을 글자 모양으로 깎고 블랙베리 즙을 잉크로 쓴다.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어린 시절 읽던 [*래빗 힐(Rabbit Hill)*](https://bookshop.org/a/12476/9780142407967)과 [*조니 트레메인(Johnny Tremain)*](https://bookshop.org/a/12476/9780547614328)을 물려줬다. 어머니는 책을 받았을 때 안쪽 표지에 자신의 서명을 써두었다. 나는 내 서명을 덧붙였다.

*디 애틀랜틱(The Atlantic)* 삽화. 출처: 다이얼 프레스.
고등학교 때 나는 고전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선생님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책을 계속 추천했다. 나는 그들의 지식을 공유하고 그들의 참조를 이해하고 싶었다. [*제인 에어(Jane Eyre)*](https://bookshop.org/a/12476/9780141441146)를 힘겹게 읽었고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https://bookshop.org/a/12476/9780143035008)에 빠졌다. 읽는 동안 나는 혼자였지만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이 책들에는 여러 세대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제임스 볼드윈은 1963년 *라이프(Life)* 프로필에서, *타임(Time)* 표지에 등장한 지 불과 일주일 뒤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자신의 고통과 상심이 세계 역사에서 전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다 읽는다. 나를 가장 괴롭힌 바로 그 것들이 살아 있는 모든 사람, 혹은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모든 사람과 나를 연결하는 것임을 도스토옙스키와 디킨스가 가르쳐줬다.” 나는 내가 지식과 문화의 끊기지 않은 사슬 일부가 된 듯 느꼈다.
그 뒤 몇 년 동안,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습관은 미끄러져 나갔다. 변화는 미묘했다. 나는 더 바빠졌다. 잠들기 전 책을 읽는 대신 휴대전화를 스크롤하기 시작했다. 몇 쪽만 읽어도 주의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덜 읽는다고 무슨 상관인가? 내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터였다. 나중에 집어 들면 됐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사라졌을 때, 두루마리에 새겨져 있던 지식은 영원히 사라졌다. 에라토스테네스와 유클리드가 또 무엇을 썼을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텍스트는 먼지가 됐다. 오늘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도서관의 모든 말은 컴퓨터 칩 하나에 저장될 수 있다. 요즘에는 가장 obscure한 학술 단행본까지 스캔되고 디지털화된다. 구글 북스와 인터넷 아카이브는 헤아릴 수 없는 규모의 도서관을 이룬다. 우리는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위험한 여정이 아니라 몇 번의 키 입력으로 그곳에 갈 수 있다. 그 텍스트들이 습기나 쥐에 굴복할 위험은 거의 없다.
하지만 무관심이라는 위협은 남아 있다.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그 텍스트들을 읽을 능력과 의향이다. 놀라울 만큼 풍부한 정보와 지혜가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졌다. 이 유산으로 무엇을 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