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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in man

두개골 안에 갇힌 뇌로 어떻게 세계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신경과학자 데일 퍼브스(Dale Purves)가 그 단서를 제시한다.

분광적으로 동일한 패치도 분광적으로 다른 주변에 놓이면 색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여기 있는 두 개의 중앙 표적은 동일하다. 제공: Purveslab / 듀크대학교

아시프 가잔파르(Asif Ghazanfar)는 뉴저지주 프린스턴대학교 프린스턴 신경과학 연구소와 심리학과의 교수다. 그의 연구실은 인간 의사소통의 발달적·진화적 기초를 연구한다.

편집: 샘 헤이즐비(Sam Haselby)

누군가가 손을 씻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배수구로 흘러내리는 물은 짙은 붉은색이다.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그 장면이 놓인 맥락과 당신의 경험에 달려 있다. 그 사람이 주유소 화장실에 있고, 당신이 방금 최신 실화 범죄 시리즈를 봤다면, 이건 연쇄살인범의 손 씻기처럼 보일 것이다. 그 사람이 부엌 싱크대 앞에 있다면, 아마 요리하다가 손을 베었을지도 모른다. 미술 작업실이라면, 손에 묻은 물감을 지우려 애쓰던 기억이 떠오를 수 있다. 범죄 서사, 요리, 그림에 익숙하지 않다면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현장에 직접 있어 누군가가 손에 묻은 짙은 붉은색을 싱크대에 씻어내는 모습을 본다면, 당신의 반응은 훨씬 더 많은 변수에 좌우된다.

우리가 세계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우리 종에 특유하다. 철학자이자 생물학자인 야코프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 1864-1944)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움벨트(umwelt)’, 즉 자기중심적 세계 속에 산다. 단순히 모든 감각 정보를 받아들인 뒤 결정을 내리는 일이 아니다. 첫째, 우리의 눈, 귀, 코, 혀, 피부는 이미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 느낄 수 있는지 걸러낸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새처럼 자외선을 보지 못하고, 코끼리나 수염고래처럼 초저주파를 듣지도 못한다. 둘째, 우리 몸의 크기와 형태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을 결정한다. 복잡한 도시 환경에서 달리고, 도약하고, 오르고, 뛰는 파쿠르 선수들은 놀라운 기술과 대담함을 보여 주지만, 같은 행동을 하는 고양이라면 입지 않을 부상을 입는다. 모든 동물은 각자 환경을 이용하는 고유한 재주를 지녔지만, 그 재주는 다른 조건에서는 한계가 되기도 한다. 셋째, 세계, 곧 우리의 환경은 변한다. 계절이 바뀌면 동물이 먹을 수 있는 것도 바뀐다. 우기라면 풀이 풍부할 것이다. 풀의 양은 그것을 먹는 존재가 누구인지, 따라서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존재가 누구인지도 결정한다. 결국 우리 각 동물이 맞닥뜨리는 과제는 감각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고 몸의 자유도도 제한된 이 불안정한 세계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이다.

여기에 흔히 인정되지 않는 네 번째 제약이 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이 보고(또는 듣고, 느끼고) 있는 것이 바깥 세계를 정확히 재현한 것이라고 직감한다. 다른 사람도 똑같이 보고, 듣고, 느낄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안다. 그런데도 늘 그 사실에 놀란다. 문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이다. 우리의 눈과 귀가 받아들이는, 겉보기에는 아주 기본적인 감각 정보조차 부정확하다. 예를 들어 ‘빨강(red)’ 같은 기본 색을 우리가 어떻게 지각하는지는 언제나 빛의 양, 주변 색, 그 밖의 요소들에 달려 있다. 조명이 어두우면 싱크대로 흘러가는 짙은 붉은색은 검게 보일 수 있다. 싱크대가 노랗다면 더 주황빛으로, 파랗다면 보랏빛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눈이 아니라 분광광도계(spectrophotometer)라는 장치로 그 장면에서 나오는 빛의 파장을 측정하면, 주변 색이 무엇이든 그 ‘피’에서 반사된 빛의 파장은 같다. 우리의 눈은 분광광도계처럼 파장을 측정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어두운 밤 도시 거리. 작은 건물 하나가 붉은 빛을 내며 빛나고, 그 주변을 더 큰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러시아 울리야놉스크, 1990년. 사진: 피터 말로/매그넘 포토스

노스캐롤라이나 듀크대학교의 조지 B 겔러 신경생물학 석좌교수(명예교수) 데일 퍼브스는 우리가 세계를 결코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에, 뇌의 주된 목적은 말 그대로 ‘말이 되게(make sense)’ 행동을 이끄는 연합을 형성하는 데 있다고 본다. 퍼브스에게 ‘이해하기(make sense)’란 능동적 과정이다. 뇌는 과거 경험에 기초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추론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주변 환경을 해석하며 일관된 그림을 구성한다. 우리의 뇌는 학습된 패턴과 기대를 이용해 불완전한 감각과 유한한 경험을 보완하고,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게 해 준다.

퍼브스는 과학자들의 과학자다. 그는 자신이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질문을 좇고, 독창적인 접근과 아이디어로 그것을 탐구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는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려는 목표 아래 연구 주제를 여러 차례 바꿨다. 유행하는 기법이나 주제를 좇거나 익숙한 연구 경로에 머무르기보다, 자신에게 새롭고 낯선 문제에 도전했다. 그의 경력은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이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 (1946)에서 한 다음 말을 떠올리게 한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뒤따라오는 것이며, 오직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어떤 대의에 개인적으로 헌신한 결과로 생기는 의도치 않은 부산물일 뿐이다 …” 성공을 찬사와 수상 경력으로 잰다면, 그것은 분명 퍼브스의 연구를 뒤따랐다. 수많은 상과 영예 가운데서도 그는 미국 국립과학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989)과 현재의 미국 국립의학원(National Academy of Medicine, 1996)에 모두 선출된 몇 안 되는 과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둘 중 어느 한 곳에 선출되는 것만으로도 미국에서 과학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영예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데일 퍼브스’라는 이름이 익숙하다면, 아마 대학에서 신경과학 수업을 들으며 퍼브스 등이 쓴 교과서 신경과학(Neuroscience) 을 사용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은 가장 널리 쓰이는 교과서 가운데 하나이며 현재 7판까지 나와 있다. 실제로 나도 프린스턴에서 신경과학 입문 과목을 가르칠 때 이 책을 사용했다.

이상하게도 퍼브스가 신경과학에 열정을 품기까지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예일대 학부생 시절 그는 처음에는 고전했지만, 의학으로 가기 위해 철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과학에 흥미는 생겼지만 과학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고, 의학이 가장 가까운 길처럼 보였다. 1960년 그는 정신과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하버드 의대에 입학했다. 1학년 때 그는 젊고 촉망받는 신경과학자들이 가르치는 신경계 강의를 들었다. 그중 일부는 훗날 20세기 거장이 되었고, 그들의 연구는 지금 교과서에 실려 있다. 데이비드 포터, 에드 퍼슈판, 데이비드 허벨, 토르스텐 비젤이 그들이다. 마지막 두 사람은 로저 스페리와 함께 1981년 노벨상을 받았다. 퍼브스는 1964년 의학 학위를 마쳤지만 정신의학에 회의를 느끼게 됐다. 일반외과로 방향을 바꿔 보기도 했으나, 탁월해지려면 필요한 정도의 강렬한 흥미가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65년, 베트남 전쟁은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줬다. 퍼브스는 징집됐지만, 의사였기 때문에 평화봉사단(Peace Corps) 직원으로 복무할 수 있었고, 실제로 베네수엘라에서 그렇게 했다. 그곳에서 그는 딘 울드리지(Dean Wooldridge)의 뇌의 기계(The Machinery of the Brain) (1963)라는 책을 접했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가 몇 해 전 1학년 신경계 강의에서 배운 내용을 종합한 것이었다. 일반 독자를 위해 쓰인 이 책은 인간과 다른 동물의 뇌에 관해 당시 알려진 지식을 소개했다. 특히 뇌를 당시의 컴퓨터 기술과 비교하는 관점이 특징적이었다. 이 책은 의대 시절 처음 싹튼 그의 뇌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퍼브스는 신경과학 연구자로서 새 출발하게 된다.

성체 닭보다 발달 중인 배아에 더 많은 뉴런이 있었다

내가 처음 퍼브스의 연구를 읽은 것은 아이다호대학교 학부생 때였다. 1990년대 초였고, 나는 퍼브스처럼 철학을 전공했지만 신경과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생물학과 교수의 연구실에서 직접 연구 경험을 쌓기로 했다. 우리는 쥐 척수의 운동뉴런, 즉 다리 근육과 연결되어 수축을 일으키는 뉴런의 면역계 표지를 연구하고 있었다. 지도교수 마크 드산티스(Mark DeSantis)는 퍼브스의 책 한 권을 권했다. 당시에는 뇌를 다루는 강좌나 진지한 책이 거의 없었다. 퍼브스의 몸과 뇌: 신경 연결의 영양 이론(Body and Brain: A Trophic Theory of Neural Connections) (1988)은 완벽했다. 내가 바로 필요로 하던 책이었다. 이 책의 중심 논지는 연결을 형성하는 뉴런의 생존과 그 연결의 수(number) 가 그 뉴런 연결의 표적(target)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심한 설계도에 따라 만들어지는 컴퓨터의 정적인 회로기판과 달리, 신경계의 회로는 연결의 표적으로부터 받는 신호에 맞춰 그때그때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 표적은 다른 뉴런일 수도 있고, 몸의 기관이나 근육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한 개체의 발달 과정이나 종의 진화 과정에서 몸이 변하면, 신경 회로도 그에 맞춰 조정된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 퍼브스는 뇌가 단순히 몸을 통제하는 기관이 아니라, 신체의 크기와 형태, 활동의 영향을 받으며 몸 전체와 역동적 관계(dynamic relationship) 속에 놓인 기관계라는 점을 보여 주었다.

검은 배경 위에 선명한 색으로 표현된 뇌의 신경망 3차원 렌더링.

휴먼 커넥톰 프로젝트 제공

퍼브스가 이 이론의 출발점을 설명할 때 즐겨 드는 사례 가운데 하나는 그의 과학적 영웅 중 한 사람인 빅토르 함부르거(Viktor Hamburger)의 연구다. 함부르거는 1930년대에 중추신경계 발달을 연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시카고대학교에서, 이후에는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였다. 닭 배아와 척수 운동뉴런을 이용해 함부르거는 성체 닭보다 발달 중인 배아에 더 많은 뉴런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왜 배아에는 실제로 필요한 수보다 더 많은 뉴런이 있고, 그중 일부는 죽어 사라질까? 함부르거의 생각은 이 뉴런들이 표적으로 삼는 근육이 제한된 양의 영양성(trophic), 즉 영양 인자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표적 근육이 뉴런을 살게 하는 ‘먹이’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지금은 이를 ‘신경성장인자(nerve growth factor)’라고 부른다. 표적의 크기가 얼마나 많은 먹이가 있는지를 결정하고, 따라서 얼마나 많은 뉴런을 살릴 수 있는지도 정한다. 함부르거는 병아리 배아를 쉽게 조작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이를 입증했다. 먼저 날개싹, 즉 형성 중인 날개의 싹 하나를 절단했다. 그러자 절단된 쪽의 최종 운동뉴런 수는 정상보다 적어졌고, 척수의 ‘대조군(control)’ 쪽에 비해 더 적은 수가 남았다. 즉, 사지싹은 뉴런의 생존에 중요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맞다면, 이런 ‘표적 조직(target tissue)’이 더 많아지면 더 많은 뉴런이 살아남아야 한다. 원래는 죽을 운명이던 여분의 뉴런을 ‘구해낼(rescue)’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함부르거는 배아 한쪽에 여분의 사지싹을 외과적으로 붙여 표적 조직을 인위적으로 늘렸다. 결과는 이랬다. 척수 그쪽에서 더 많은 운동뉴런이 살아남았다. 두 실험 모두에서 연결의 표적 크기, 구체적으로는 몸과 그 사지싹의 크기가 살아남는 뉴런 수를 결정했다. 퍼브스는 몸과 뇌 사이의 이런 대화적(dialogic) 관계라는 아이디어를 더 밀고 나갔다.

약 40년 뒤인 1970~80년대, 퍼브스는 워싱턴대학교에서 이제 젊은 교수로 일하고 있었고, 함부르거는 원로 교수였다. 그곳에서 그는 함부르거의 뉴런-근육 연결 이론을 뉴런-뉴런 연결에 적용했다. 퍼브스는 함부르거처럼 뉴런 세포의 생존도 살폈지만, 거기에 더해 뉴런이 만드는 개별 연결, 즉 시냅스(synapse) 의 제거와 정교화도 연구했다. 이는 큰 도약이었다. 퍼브스는 이제 병아리 배아에서 나타난 뉴런의 죽음과 생존에 관한 함부르거의 발견이 그 종의 뉴런-근육 관계에만 특수한 현상인지 시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의 다른 발달 회로에서도 같은 과정이 나타날까? 그렇다면 뉴런이 살아남는 경우, 연결의 수, 즉 시냅스 수 역시 영양 인자를 두고 경쟁의 영향을 받을까?

뉴런은 모양과 크기가 모두 다르고 복잡성의 정도도 제각각이다. 전형적인 단일 뉴런 그림을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 한쪽 끝에는 뿌리 같은 가지들이 퍼져 있고 다른 한쪽에는 길고 팔다리 같은 가지 하나가 뻗은 나무나 관목처럼 생겼다는 것을 알 것이다. 상황에 따라 그 긴 가지도 다시 갈라질 수 있다. 이 두 가지 집합 가운데 하나인 수상돌기(dendrite)는 다른 뉴런으로부터 입력을 받고, 다른 하나인 축삭(axon)은 다른 뉴런에게 출력을 보낸다. 대학원생 제프 리히트먼(Jeff Lichtman)과 함께 퍼브스는 시냅스 수가 발달(development) 과정과 동물의 서로 다른 종(species) 사이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고 싶어 했다. 퍼브스와 리히트먼은 비교적 단순한 뉴런-뉴런 연결부터 시작했다. 이 경우 입력을 받는 뉴런에는 수상돌기가 없고, 신호를 보내는 뉴런의 축삭이 수용 뉴런의 세포체에 직접 시냅스를 만든다. 이를 보기 위해 그들은 서로 다른 동물에서 기능이 비슷한 뉴런이 빽빽이 모인 ‘신경절(ganglion)’을 외과적으로 떼어 냈다. 그런 다음 특수한 효소로 개별 뉴런 몇 개를 조심스럽게 채웠다. 이 효소에 반응할 화학물질을 넣으면 색이 생긴다. 이 염색 덕분에 뉴런은 현미경 아래에서 가지를 모두 드러낸 채 관찰할 수 있고, 그 가지를 세는 것도 가능해진다. 미세한 유리 공예 촉수 생물에 먹물을 채워 넣고 그 부속지를 하나하나 세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뇌와 몸은 하나의 통합적이고 역동적인 네트워크를 이룬다. 둘을 떼어낼 방법은 없다

각 가지의 끝은 하나의 시냅스 연결을 뜻한다. 발달 중인 쥐와 성체 쥐의 연결을 비교한 결과, 뉴런은 처음에는 여러 다른 뉴런으로부터 몇 개의 시냅스를 받는다. 말하자면 어린 쥐의 회로는 뒤엉켜 있었다. 그런데 성체가 되면 각 뉴런은 시냅스를 많이 갖지만 그 출처는 단 하나의 뉴런뿐이었다. 회로가 풀린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표적 크기에 따라 여분의 뉴런이 제거되는 과정과 비슷하게, 일부 뉴런에서 불필요한 연결이 제거되는 과정이 있었다. 이어서 ‘올바른’ 뉴런에서 오는 연결이 증식하거나 정교화되는 추가 과정이 있었다. 본질적으로 뉴런이 덜 바람직한 상대를 없애면서 적절한 짝을 찾고 나면, 그 관계는 더 많은 시냅스를 형성하는 형태로 꽃필 수 있었다. 퍼브스와 리히트먼은 이후 더 복잡한 뉴런 집합과 다른 종에서도 이 기본 발견을 재현했다.

세부에 빠져들기 전에 핵심만 말하자. 뉴런 사이의 영양적 상호작용은 뉴런 수를 표적 크기에 맞추고, 동시에 이들이 몇 개의 시냅스를 만들지도 조절한다. 더 큰 이론은 이렇다. 신경 경로에 있는 각 세포 집단은, 그 경로 아래쪽에서 자신과 연결된 세포들과 영양적 상호작용을 하며 자신이 받는 연결을 유지하고 조절한다. 따라서 몸의 근육과 기관에 대한 뉴런의 연결부터 뇌 내부 뉴런들 사이의 연결에 이르기까지, 조율된 연결성의 사슬이 이어진다. 뇌와 몸은 하나의 통합적이고 일관되며 역동적인 네트워크를 이룬다. 둘을 분리할 방법은 없다. 모든 수준에서 서로에게 의존한다.

어떤 예술가는 경력 동안 뚜렷하게 다른 시기를 거치고, 또 어떤 예술가는 수십 년 동안 비슷한 주제나 접근법을 유지한다. 과학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하나의 특정한 질문에 답하려고 점점 더 깊이 파고든다. 연구 대상의 세부를 더 많이 알아갈수록 더 깊이 들어간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어느 시점에서 현재 손에 쥔 답에 만족하고, 새로운 질문이나 도전을 찾아 이동한다. 퍼브스는 후자에 속한다. 그는 과학 연구에서 여러 번 급진적인 전환을 해 왔다. 영양 이론을 뒷받침한 그의 중요한 연구는 분명한 다음 단계를 제시하고 있었다. 분자생물학적 도구를 활용해 시냅스 발달을 시각화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그러나 퍼브스는 거기에 흥미가 없었다. 그때까지 그의 연구 프로그램은 말초신경계에서 조작하기 쉽고 명확하게 시각화할 수 있는 신경 회로를 활용해 왔다. 하지만 정작 모든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고 여겨지는 뇌 자체는 전혀 달랐다. 복잡성과 밀도가 너무 높아서 어떤 연결이 사라지고 어떤 연결이 늘어나는지 같은 질문을 같은 수준의 명료함과 특이성으로 다루기가 불가능했다.

신경과학 자체도 변하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이르면 가장 주목받는 연구는 뇌, 특히 영장류인 인간에서 유난히 크게 발달한 부분인 신피질(neocortex)에 집중됐다. 뇌가 어떻게 발달하는지에 관심이 있던 많은 사람은 시각 신피질에 중요한 발달 시기(critical period)가 있음을 우아하게 입증한 노벨상 수상자 허벨과 비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이 무렵 퍼브스는 중년에 접어들었고, 막다른 지점에 서 있었다.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저절로 드러나지 않았다. 학계 과학자는 대체로 무엇이든 연구할 수 있지만, 그것은 흥미로워야 하고, 잠재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낳아야 하며, 특히 퍼브스에게는 다룰 수 있는 문제여야 했다. 즉, 명확한 가설을 세울 수 있고 분명한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했다. 답은 새로운 협력자 앤서니 새뮤얼 라만티아(Anthony-Samuel LaMantia)의 형태로 왔다. 라만티아는 신피질 발달로 박사학위를 마친 뒤 1988년 박사후연구원으로 퍼브스의 연구실에 합류했다. 퍼브스와 라만티아는 함께 ‘뇌는 어떻게 자라는가?’라는 질문에 도전하기로 했다.

생쥐는 완전한 수의 사구체(glomeruli)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발달이 진행되며 새로운 사구체가 더해졌다

뇌의 종류는 매우 많다. 동물의 수만큼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모든 뇌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설계 원칙에 놀랍도록 잘 들어맞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각 경우의 설계자는 특정 종이 환경의 도전에 대응해 어떤 방식으로 발달하고, 그에 따라 몸과 뇌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지를 좌우하는 자연선택이다. 뇌과학자들은 추적자, 염색, 영상 촬영 등 여러 기법을 이용해 이런 해법의 해부학을 연구한다. 각 기법은 뇌를 특정 공간 규모에서 들여다보는 데 적합하다. 그리고 일관되게 드러나는 것은 뇌가 아름답고, 때로는 경이로울 정도라는 사실이다. 그 규모 중 하나에서는 동물의 피부에 나타나는 점무늬와 줄무늬를 연상시키는, 반복되는 신경 회로 패턴, 즉 모듈(module) 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염색약을 쓰느냐에 따라 영장류의 시각피질에는 줄무늬 패턴이 보이는데, 각 줄무늬는 두 눈 가운데 하나에서 오는 시각 신호를 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방식으로 염색하면 ‘블롭(blob)’ 배열이 나타나고, 일부 연구자들은 이것이 색 처리에 특화돼 있다고 본다. 다른 동물은 다른 패턴을 가진다. 쥐는 체성감각, 즉 촉각 피질에 원통 모양의 모듈 배열이 있는데, 이것은 얼굴 수염 배열과 대응한다. 돌고래는 청각피질에 블롭이 있지만, 그 기능은 아직 모른다.

퍼브스는 이런 반복되는 신경 회로 패턴이 어떻게 발달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먼저 신피질 바로 바깥, 생쥐의 후각망울(olfactory bulb)을 살폈다. 이 구조 안에서 생쥐는 ‘사구체(glomeruli)’로 알려진 여러 모듈을 가진다. 생쥐의 후각망울은 뇌 본체에서 돌출되어 있어 실험 접근이 더 쉽다. 퍼브스와 라만티아는 살아 있는 동물에서 후각망울을 노출하고, 생쥐를 해치지 않는 염료로 사구체를 염색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 결과 생쥐는 완전한 수의 사구체를 갖고 태어나지 않으며, 발달 과정에서 새로운 사구체가 추가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매우 흥미롭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많은 이론은 뇌 발달이 주로 더 큰 가능 회로 집합 가운데 유용한 회로를 선택하는 결과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유용한 회로가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구축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더 나아가 동물이 태어난 뒤 이런 식으로 회로가 구축된다면, 그 회로는 경험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다른 종, 다른 뇌 영역의 모듈도 같은 방식으로 더해질까? 마카크원숭이의 시각피질, 즉 인간과 가장 가까운 실험동물의 가장 많이 연구된 뇌 영역 중 하나에서는, 생쥐처럼 같은 동물의 같은 뇌 구조를 시간에 따라 반복해서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모듈 발달을 추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린 원숭이와 성체 원숭이의 블롭 수를 세는 것은 가능했다. 그런데 생쥐의 사구체와 달리 블롭의 수는 시간이 지나도 일정하게 유지됐다.

퍼브스에게 이것은 크게 흥분되는 결과는 아니었다. 그는 영장류 신피질 발달의 새로운 과정, 더 나아가 새로운 연구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길 바랐다. 그럼에도 그는 한 가지 중요한 결론에 이르렀다. 많은 과학자들, 실제로는 신경과학의 저명한 인물들까지도 뇌의 모듈을 신피질의 근본적 특징으로 보며, 각각이 특정한 행동적 또는 지각적 목적을 수행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예컨대 쥐의 촉각 피질에 있는 한 개의 ‘배럴(barrel)’은 얼굴 수염 하나에서 들어오는 입력을 처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퍼브스는 반복되는 모듈 패턴이 어떤 종의 뇌에는 있지만 가까운 친척 종에는 없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런 패턴이 반드시 기능과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인간과 원숭이의 시각피질에는 ‘블롭’이 있고 이것이 색시각 처리와 연관된다고 하지만, 색각이 좋지 않은 야행성 영장류도 시각피질에 블롭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블롭이 색시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비슷하게 친칠라는 쥐처럼 배럴 피질을 가졌지만 쥐와 같은 수염 움직임은 없다. 고양이와 개는 수염이 있지만 촉각 피질에는 그에 대응하는 모듈이 없다.

그렇다면 뇌의 반복 패턴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현대 건축물처럼 그 아름다움이 기능과 직접 연결된 것은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패턴이 형성될까? 여기서 퍼브스는 반복 패턴이 시냅스 연결이 서로를 찾아 의지하고, 가장 활발한 경로에서 더 많은 연결을 만들어 내는 과정의 결과라고 제안했다. 다시 말해 뇌의 반복 패턴은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신경 연결의 규칙과 경쟁하는 신경 활동 패턴이 낳은 부산물(epiphenomenal)이라는 것이다. 그 활동 패턴은 눈, 귀, 코, 피부 같은 감각기관에서 들어오는 감각 입력에 의해 생성된다. 따라서 뇌에서 아름다운 패턴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내가 처음 퍼브스를 만난 것은 1993년 대학원 면접을 보러 갔을 때였다. 그는 이미 듀크대학교로 옮긴 뒤였다. 나는 그의 논문을 많이 읽은 상태였고, 주류에서 벗어나 있지만 중요한 연구를 향한 그의 반골 기질과 집요함에 경탄하고 있었다. 면접을 위해 그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몹시 긴장했지만, 벽에 걸린 초상화들에 대해 물을 수는 있었다. 모두 과학자들이었다. 19세기 영국 생리학자 존 뉴포트 랭글리(John Newport Langley)는 신경전달물질에 관한 중요한 발견을 했고, 퍼브스가 신임 교수로서 처음 다뤘던 문제들에 영감을 줬다. 앞서 언급한 빅토르 함부르거의 사진도 있었다. 그는 20세기 발생학의 거물일 뿐 아니라, 나이와 경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퍼브스의 좋은 친구였다. 또 다른 사진은 당시 신경과학계에서 아마 가장 사랑받던 인물이며 시각 연구의 핵심 발견을 이룬 스티븐 커플러(Stephen Kuffler)였다. 커플러는 퍼브스가 의대생이었을 때 그를 가르친 신경과학 팀을 조직한 인물이었고, 퍼브스는 그를 신경과학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고 무엇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 준 멘토로 여긴다. 마지막 사진은 뉴런이 근육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밝혀낸 노벨상 수상자 버나드 카츠(Bernard Katz)였다. 퍼브스는 1970년대 카츠와 협력했고, 그를 과학적 탁월함의 전형으로 여긴다. 나는 듀크에 합격했고, 1년 뒤 노스캐롤라이나 더럼으로 이주해 당시 그곳의 신임 교수였던 라만티아나 퍼브스와 함께 공부하기를 바랐다.

내가 듀크에 도착했을 무렵, 퍼브스는 뇌 자체를 연구하는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큰 변화를 앞두고 있었다. 발달 중인 신경계에 관한 발견으로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고, 부러움을 살 만한 경력을 쌓고, 학계에서 찾는 지도자가 된 뒤였으니 다소 미친 일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퍼브스의 restless instinct, 즉 가만있지 못하는 본능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이번에는 지각(perception) 연구로 초점을 옮겼다. 그는 뇌의 해부학과 그 안의 회로 기능에 관한 놀라운 진보만으로는 뇌가 실제로 인간의 행동을 어떻게 이끄는지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이 직감의 뿌리는 그가 학부에서 전공한 철학에 있었다. 철학자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는 우리 눈이 크기가 크게 다른 3차원 물체를 받아들인 뒤, 그것을 망막(retina), 즉 눈 뒤쪽의 감각 벽에 정확히 같은 크기의 2차원 영상으로 투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것이 ‘광학의 역문제(inverse optics problem)’다. 멀리 있는 사람의 전신을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마치 눌러 부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장난이 우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제 원근(forced perspective)을 이용해 불가능한 일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역문제가 뜻하는 바는 심오하다. 대상, 즉 근원(source)에 대한 정보가 뇌로 들어올 때 그것은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며, 부분적이라는 뜻이다.

어두운 배경 앞, 성직자 복장을 한 남성이 책을 들고 앉아 있는 초상화. 뒤편에는 풍경이 보인다.

조지 버클리의 초상(Portrait of George Berkeley) (1730), 존 스미버트 작품. 위키피디아 제공

역문제의 해법으로 과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94)는 지각이 경험으로부터의 학습에 의존한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사물에 대해 배우고, 모호한 영상에 대해 추론한다. 그래서 소인국 사람 같은 인간을 본 경험이 없으므로, 강제 원근 사례 속 아주 작은 인간은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퍼브스는 헬름홀츠 아이디어의 씨앗, 즉 우리의 지각이 경험에 의존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여 하나의 완전한 연구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켰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그는 동료들과 함께 밝기, 대비, 운동, 기하학에 관한 다양한 시각 착시를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우리의 지각이 현실 세계의 원천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 아니라, 경험에 기초해 구성된 것임을 보여 주었다. 이 글의 첫머리에 나온 ‘빨강’의 예도 그의 색채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확히 지각하는 우리의 능력은 대체로 과거 경험과 학습된 연합에 기초한다

퍼브스와 그의 공동연구자 보 로토(Beau Lotto)는 컴퓨터 화면에 색이 완전히 같은 두 개의 ‘표적(target)’ 사각형을 만들되, 서로 다른 색의 배경 위에 놓았다. 그러면 두 배경 때문에 그 사각형들은 서로 다른 색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분광광도계로 측정하면 동일한 색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어 참가자들에게 두 표적 사각형이 똑같아 보일 때까지 색조(hue), 채도(saturation), 밝기(brightness), 즉 스마트폰 카메라 앱에서 흔히 조절하는 바로 그 값을 조정하게 했다. 각 참가자의 조정값은 수치화되어 지각과 현실 사이의 차이를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됐다. 궁극적으로 퍼브스의 연구는 뇌가 전적으로 경험적(empirical) 기반 위에서 작동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이 세계 안에서의 과거 경험을 통해 세계에 대한 지각을 구성한다.

이는 뇌가 사물과 다른 감각 원천에서 특징을 추출하고, 그 특징을 다시 조합해 우리의 행동을 이끈다는 오랜 정설에서 급격히 벗어나는 주장이다. 특징을 추출해 뇌 안에서 조합하는 것, 예컨대 빨강+둥글다 = 사과가 아니라, 퍼브스는 세계의 어떤 사건이나 특징, 그것이 나타난 맥락, 그리고 그 뒤에 따른 행동의 결과 사이에서 우리가 학습한 연합이야말로 우리의 움벨트, 즉 자기중심적 세계를 만든다고 본다. 퍼브스와 동료들의 연구는 우리가 정확히 지각하는 능력이 대체로 과거 경험과 학습된 연합에 바탕을 둔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이는 우리 주변 공간, 그 안의 사물, 그리고 지각의 다른 측면들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달한다. 이는 매우 타당하게 들린다. 환경은 언제나 변하고, 어느 동물이든 시기마다 다른 도전에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더는 살지 않는 환경에 맞춰 뇌가 지나치게 정교하게 조정되어 있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종이 매 세대마다 각 개체의 뇌를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백지 상태로 처음부터 만들게 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퍼브스의 발견과 해석은 더 철학적인 수수께끼로 이어진다. 뇌가 이해하려 애쓰는 ‘환경’은 실제로 얼마나 우리 머리 바깥 ‘저기(out there)’에 존재하는가? 진짜 현실(real reality)은 있는가? 퍼브스는 설령 진짜 현실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의 많은 부분을 지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적어도 그것을 모두가 똑같이 지각하는 보편적 방식은 없다. 예를 들어 모든 인간이 같은 색을 같은 방식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색과 그 해석이 환경 요인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각이 경험에도 의존한다는 점이다. 경험은 당신이 어떤 특정 환경과 상호작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바다에 사는가, 육지에 사는가, 굴속에 사는가, 둥지에 사는가, 아니면 온도 조절이 되는 집에 사는가? 시각이 있는가, 아니면 보지 못하는가? 당신의 생리와 해부학은 무엇을 지각하고 무엇과 상호작용하게 허용하는가? 이전에 무엇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과 다른 동물들의 세계 지각과 해석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에 달려 있다.

애니 딜러드(Annie Dillard)는 회고록 팅커 크리크의 순례자(Pilgrim at Tinker Creek) (1974)에서 시각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접한 이야기를 쓴다. 모든 연령대의 선천적 시각장애인이 갑자기 볼 수 있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는 책이었다. 정말로 경험이 우리가 세계를 보고 그 안에서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할까? 그 책은 마리우스 폰 젠덴(Marius von Senden)의 공간과 시각(Space and Sight) (1960)이었다. 그 책에서 젠덴은 백내장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환자들이 백내장을 제거한 뒤 세상을 어떻게 보았는지 묘사한다.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지녔던 우리처럼 그들도 세상을 볼 수 있었을까? 아니었다. 대부분의 환자는 그렇지 못했다. 딜러드는 그 책의 한 사례를 이렇게 전한다.

수술 전 의사는 앞을 보지 못하는 환자에게 정육면체와 구를 쥐여 주곤 했다. 환자는 그것을 혀로 핥아 보거나 손으로 만져 보고 정확히 이름을 맞혔다. 수술 후 의사는 같은 물체를 환자에게 보여 주되 만지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환자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마침내 자기 어머니를 ‘보게’ 되었지만 멀리서 본 탓에 알아보지 못한 환자의 사례도 있다.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시각 경험을 통해 배우는 크기와 거리의 관계, 즉 강제 원근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얼마나 큰지 묻자, 그는 두 손가락을 몇 인치 정도 벌려 보였다. 이런 종류의 실험은 여러 방식으로 재현되었고, 세계를 이해하는 데 경험과 학습된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보여 준다.

오늘날 퍼브스는 신경계의 작동 원리 하나, 혹은 그가 더 조심스럽게 말하듯 ‘적어도 그렇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을 보여 줄 만큼 충분한 연구를 축적했다. 신경계의 기능은 감각계가 정확히 포착할 수 없는 세계에서 적응적 행동, 즉 생존과 번식으로 이어지는 행동을 이끌기 위해 신경 연합을 만들고, 유지하고, 수정하는 것이다. 퍼브스의 현재 생각을 그의 초기 영양 이론 연구와 연결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생물학적 행위자는 설계도나 지시 없이 변화하는 몸의 크기와 형태에 맞는 신경계를 스스로 조립해야 한다. 그리고 독특한 방식으로 세계를 걸러 내는 감각기관과 짝을 이룬 이 신경계는 어떻게든 세계의 물리적 상태를 처리해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 발달을 이끌었던 것과 비슷한 원리, 즉 신경 활동과 변하는 시냅스 연결이 계속 변하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현재 지각도 이끈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이용해 이러한 안내를 수행한다. 우리가 다른 인간들과 비슷하게 사건을 지각하거나 해석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비슷한 몸을 가졌고 또한 어느 시점에는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퍼브스(Purves) 는 과학적 탁월함의 전형이다.

퍼브스는 먼저 크고 흥미로운 질문을 찾아낸다. 그런 다음 답을 찾는 데 필요한 수단이 무엇이든 마련한다

최근 나는 퍼브스에게 자신의 경력 궤적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는데, 그 대답은 내가 보던 방식과 매우 달랐다. 내 관점에서 보면, 퍼브스의 질문은 늘 ‘신경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인 듯하다. 이 질문을 추적하면서 그는 점점 더 큰 규모로 나아갔다. 말초신경계의 영양 이론과 신경 연결에서 출발해, 뇌의 신경적 구성(반복 패턴, 신피질의 성장), 다시 뇌 영역 크기와 지각 정확도의 관계, 끝으로 경험을 통한 ‘현실(reality)’의 구성으로까지 확장됐다. 나는 그에게 이런 서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게 틀 지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실제로 어떤 서사적 호(arc)를 보지는 않습니다. 알다시피 연구는 흔히 연구비를 받을 가능성이 더 높은 방향이 무엇인지, 혹은 당대의 인기 있는 문제를 다루는 일이 무엇인지 같은 속되거나 사소한 고려에 의해 움직이곤 합니다. 당신이 말한 주제, 곧 신경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내 생각의 중심에 그리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돌이켜 보면, 그런 서사가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

우리 둘 다 틀린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각자의 경험과 필요에 맞춰 그의 작업 전체를 해석하고 있다. 바로 그의 연구가 시사하는 방식대로 말이다.

퍼브스의 놀라운 연구 통찰은 과학을 대하는 그의 독특한 접근법의 산물이다. 신경과학에서 흔한 방식은 경력 초기에 하나의 문제를 정하고, 그 문제를 향해 계속 파고들며 점점 더 많은 세부를 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1990년대의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이나 2000년대의 광유전학(optogenetics)처럼 새로운 흥미로운 기법을 익혀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탐구하기도 한다. 또는 새 기법을 도입한 뒤 그 방법으로 답할 수 있는 새로운 질문을 찾는다. 다른 접근은 우선 방법을 적용하고 데이터를 모은 다음, 그 데이터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묻는 것이다. 이런 접근들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퍼브스의 과학적 접근은 이와 뚜렷하게 다르다. 그는 먼저 크고 흥미로운 질문, 어쩌면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찾아낸다. 그리고 답을 찾는 데 필요한 수단이 무엇이든 마련한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연구와 접근 뒤에는 많은 사유가 있다. 또 어떤 발견이 뇌과학의 큰 그림에서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깊은 사유도 있다. 퍼브스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있다. 자기 분야의 여러 영역에서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연구를 남기는 과학자는 극히 드물다. 데일 퍼브스는 작은 회로에서 큰 회로에 이르기까지 뇌 발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크게 진전시켰고, 신체 경험에서 출발해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